(우한나가) 겨우 하나 가진
장혜정_독립 큐레이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소비자의 위치를 부여받았다. 오늘날의 소비는 사물의 기능과 주체의 욕구 사이의 등가라는 전통적인 개념과 달리,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출현하고 단순한 사용가치보다는 개인의 행복, 안락함, 사회적 지위와 권위 등으로 규정되는데[1], 달리 말하면 이는 나의 삶의 질을 좌우하고 내가 무엇을 얼마큼 가졌는지를 매번 되뇌이게 하는 것이다. 우한나도 그 풍경에서 자유롭지 못한 도시의 개인이다. 그리고 결핍의 개인이다.
선택의 여지 없이 지금의 소비 습속에 따라 많은 것을 생각하고 욕구하고 평가(당)하고 비교(당)하는 우한나는 대부분의 우리와 다름없다. 우한나의 작업에는 현대화된 도시 소비문화의 모순적 순환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이 내포되어있지만, 동시에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기력을 내재한 자신을 반추하는 시선이 병립한다. 분노하고 저항하고, 응원하거나 위로하고, 공상하고 갈망하는 주체와 대상은 뒤섞여있다. 이는 모순적 풍경과 부조리 그 자체, 그 풍경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개인(그리고 우한나 자신), 그리고 무조건적 피해자인 동물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양가적 가치와 감정, 시선이 우한나의 작업을 통해 시각화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환상과 실제’, ‘유령과 요정’, ‘저항과 무(기)력’이란 단어로 걸러진다. 그리고 그 사이를 충분히 소유하지 못한 한 개인, 우한나가 부단히 누빈다.
환상과 실제 사이
우한나는 관객을 현장으로 몰아넣는다. 엉망진창 흐트러진 옷가지와 쿠션, 대충 벗어 던진 신발, 다 찢긴 커튼, 곧 넘어질 듯 제자리를 찾지 못한 기울어진 기물들, 마구잡이로 뿌려진 스프레이 페인트까지 제멋대로 뒤섞인 현장. 그 안에 있으면 조금 전까지 누군가가 큰 소음을 내며 떠들었을 것 같은 상황이 감각된다(<파자마 파티(Pajama Party>(2020)).
“그들은 왜/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과 상상을 유도하는 장면의 제시는 우한나가 꾸준히 사용하는 방식이다. 처음의 개인전 《시티 유닛츠(City Units)》(2016)에서 부터 2019년 《물라쥬 멜랑콜리크(Moulage Mélancolique)》, 가장 최근의 《마 모아띠에(Ma Moitié)》(2020)는 물론이고, <마니악스 온 포플스(Maniacs on Popples)>(2019), <파자마 파티(Pajama Party)>(2020) 등의 다수 작업에서 우한나는 특정 대상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그를 둘러싼 서사를 상상해 공간으로 구현하며, 그(들)가 행동하는 이유와 미래를 추측하게 했다. 주인공들은 환상의 존재이거나 현실의 구체적 인물일 수도 있고 우한나 자신일 수도 있으며, 익명의 개인 혹은 군중이기도 하다.
우한나가 제시하는 환상의 현장은 반드시 현실을 반영하고, 그 현실은 대부분 조금 비극적이다. 《물라쥬 멜랑콜리크(Moulage Mélancolique)》에서는 개인의 (소유) 욕망이 만들어내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드러내며 그 괴리 속 멜랑콜리를 가진 주인공의 사적인 공간을 연출했고, 《마 모아띠에(Ma Moitié)》는 디자이너로 분한 우한나가 만든 <백 위드 유(Bag with you)>(2019 - ) 시리즈를 ‘하이엔드 제품’처럼 소개/디스플레이하며 이미 우위가 정해진 듯한 오늘날의 하이엔드 브랜드 제품과 예술 작품 사이의 관계에서 예술의 방향을 자조적으로 물었다. 한편 협력자이기도 대립자이기도 한 두 강력한 여성 집단이 치열히 의견을 나누고 떠난 자리와 세상의 어떤 불의와도 싸워 낼 수 있을 듯한 에너지를 가진 10대의 여성들이 맹렬하게 단련하고 떠난 자리를 제시한 <마니악스 온 포플스(Maniacs on Popples)>와 <파자마 파티(Pajama Party)>는 여성이 여전히 약자이자 피해자로 존재하는 사회를 전제한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모든 여성들이 왜 떠났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비극적이지 않다. 결핍으로 우울한 여인은 훌훌 털고 기분전환을 위해 외출했거나, 디자이너 우한나의 시도는 최소한 하이엔드 제품과 등가로 예술 작품을 승격시키려는 시작일 수도 있고, 대립하는 두 여성 집단은 더 나은 대안을 찾아내 떠났을 수도 있으며, 정신없는 10대 여성들은 드디어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출발했을지 모른다.
유령과 요정 사이
2016년, 비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만나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한 허름한 건물 꼭대기에 (많은 젊은 작가들이 그렇듯) 우한나의 작업실이 있었다.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가는 기계와 쉼 없이 이동하는 사람들, 배달 오토바이의 소음과 움직임이 멈추는 시간, 비로소 손전등의 스위치가 눌리고 《시티 유닛츠(CITY UNITS)》가 가시성을 얻었다. 주인공은 유령이다. 어둠 속에 묻혀있다가 손전등을 비추는 성의를 갖춘 몇몇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빛나지만 비어있는 눈을 가진 존재. 유령은 완전치 못한 존재이다. 지금 있는 곳이 제자리가 아니지만 떠나지도 못하는, 무엇하나 온전히 가지지 못한 취약한 존재로 그 자리를 맴돈다.
포기와 타협으로 점철된 (주로 이 포기와 타협은 소유의 정도에서 온다) 일상 속 개인에게서 발견하는 유약함, 그러나 한편으로 아무리 밟혀도 끄떡없는 강인함을 가진 존재는 ‘유령’과 ‘요정’이 되어 우한나의 작업에서 호출/호명된다. 요정보다 먼저 등장한 유령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능동성과 가시성을 획득한 상태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시티 유닛츠(CITY UNITS)》의 유령이 한시성과 비가시성의 존재로 소중하지만 안쓰럽게 다가왔다면, 《스윙잉(Swinging)》(2017)과 <The Way I Stand>(2020)에서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결핍이 있지만, 저항의 의지를 가진 행동하는 개인이자 군중이 되어 나타난다. 비록 곧게 서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개인들의 무리는 서로를 북돋우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얼굴이 없어 감정을 읽을 수 없지만 위태로운 상황을 끝끝내 버텨내려는 한 개인이 어둠 속에 묵묵히 서 있다. 이들은 이제 오도 가도 못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며, 요정의 잠재력을 가진 존재이다.
저항과 무(기)력 사이
손에 들고 휘두를 수 있는 무엇이든 쥐고 전진하는 절름발이들의 행렬 《스윙잉(Swinging)》(2017)과 같이, 우한나의 작업은 자칫하면 내재화된 무기력과 순응으로 나약해질지 모르는 불완전한 개인(들)이 행동하는 현장을 보여 준다. 여기서 불완전하다는 것은 그들의 권위나 소유의 정도만이 아닌 윤리적 불완전함을 동시에 의미한다.
일종의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윤리적 문제가 언제나 따라붙는다. 당연히 이는 윤리는 재현적 방식뿐 아니라 재현하는 사람의 윤리적 자격에 대해 질문하는데, 간혹 전체를 향한 도덕적 명제는 기만적 이리만큼 엄격하여 모든 시도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다. 이 엄격한 때론 모순적인 잣대는 조금이라도 이동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를 폐쇄회로에 가두는 꼴이 된다. 우한나는 이와 같은 엄격한 잣대를 핑계 삼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를 제안한다. 자신/서로의 결핍을 인정하며 그 안에서 대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소비 행태에 불필요하게 다치고 사라지는 동물의 희생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하는 <당신의 요정을 찾아 #1 - #6>(2019)은 사적이거나 구체적인 단위로 반경을 설정하고 작은 움직임부터 시작하자는 캠페인이다. 여기에는 형벌을 받아 빈껍데기로 서 있는 사람, 경직된 동세로 울고 있는 마칭걸, 털이 다 뜯긴 라쿤, 곧 바스러질 듯한 지푸라기 몸을 휘감은 밍크 다발 등이 어그러지고 삐딱하게 서있다. 우한나는 이미 대부분의 우리는 현대적 소비의 방식으로 삶의 방식이 길들여져 있으므로, 이 모든 상황이 단번에 개선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히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비현실적 목표를 거두는 것부터의 시작을 촉구한다. 이 작업을 통해 문제의 시급성을 각성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파악, 나만의 ‘기준-요정'을 세워야 조금이라도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이를테면 이미 가진 것을 다 버리는 무모함 대신 앞으로의 소비를 줄이거나 적어도 모피는 입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과 같이 진정 가능한 변화를 시작해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한나 자신을 향한 반성과 다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대한 핑계를 찾지 않도록 자신을 다짐을 지켜 줄 수호신을 찾고자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남는 단어, 바늘
우한나의 바느질은 구조를 견고하게 엮기에는 충분히 단단하지 않지만 어떤 부분은 불필요하게 세밀해서 오히려 형태를 조금씩 일그러트리거나 뒤틀리게 만든다. 빼어난 장인의 손길이나 공장을 통한 생산품처럼 매끈한 형태와 마감의 상태를 갖지 못한 왜곡되거나 주름지고 어그러진 그의 오브제는 그가 소유하고 싶은 하이엔드 브랜드 제품과 가장 멀고도 가까운 대체품일 수 있다. 자신이 소유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그럼에도 특별한/유일한 것을 갖고자 하는 복합적인 심리가 손바느질 오브제로 발현/해소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한나의 바늘은 예리한 끝을 내세워 작업 사이를 관통한다. 패브릭 조각, 설치가 주를 이룬 그의 작업에서 바느질은 주요한 방식이자 도구이다. 하지만 이를 남성성과 대립하는 여성성을 발현하는 행위/표현, 피해자로서 자기 치유를 위한 여성의 행위 등의 전통적 해석은 우리도, 작가 스스로도 경계해야 하는 지점이다. 그의 작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성들은 ‘아직 사회적 약자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존재’이지만, 그 처지를 인정하는 대신 이에 ‘저항하고 대립하며 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이다. 그리고 우한나는 이와 같은 존재를 응원하고 바라는 또 다른 개인이다. 그러니 우한나의 바늘은 얼기설기 엮거나 정교한 수를 놓으며, 자신의 내부와 외부를 맴도는 모순적 고민과 갈등을 해방시키는 가장 작고 반짝이는 무기이다.
[1]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그 신화와 구조」,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2015 (1쇄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