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다애
우한나 작가의 개인전 《시티 유닛츠(CITY UNITS)》는 을지로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작가는 이곳을 ‘촉촉투명각’이라 부른다)에서 진행되었다. 원체 서울이라는 도시가 복작복작 하다지만 철공소, 공업사, 인쇄공장, 판촉물 전문 상가가 낮은 건물에 빠짐없이 들어서 있는 을지로는 서울에 또 다른 지형적 특성을 부여하는 곳이다. 을지로의 비좁은 골목을 거쳐 ‘촉촉투명각’으로 들어가는 건물의 1층까지, 밤낮 없이 돌아가는 윤전기의 규칙적인 소음이 골목 곳곳에 퍼진다.
정해진 위치에서 기계의 움직임을 쫓아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틈에서 ‘촉촉투명각’은 을지로와는 어울리지 않는 외딴 섬과 같은 공간이다. 태극빌딩 3층 복도 끝의 ‘촉촉투명각’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바깥의 소음은 이상하리만치 멀어지고, 작가의 작업이 설치된 공간은 생경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으레 느낄 수 있는 낯섦과는 또 다른 ‘촉촉투명각’만의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는 19시부터 23시에만 개방하는 전시의 특성상 공간 곳곳에 가라앉아 있는 어두움에서부터 일정 정도 비롯된 것이었다.
전시장의 위치도 전시의 시간도 어긋나 있는 《시티 유닛츠》에서 작가가 소환해낸 형상은, 의미심장하게도 유령들이다. 유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조각 외에도, 높은 탁자 위에 닿을 듯 가까이 붙어 있는 세 개의 머리(〈관람모델 A to C〉)와 신체가 뒤틀린 채 의자에 앉아 있는 〈갈 곳 없는 여자〉 역시 경직된 육체의 모습으로 이미 죽어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 세계’에도 ‘저 세계’에도 모두 속하는 유령은, 결국은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로 시공간이 뒤틀린 ‘촉촉투명각’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생명 없는 유령에게 우한나 작가가 생생하게 부여하고 있는 기관은 바로 ‘눈’이다. 서로를, 때로는 모니터를, 혹은 허공을 향한 유령의 시선은 시선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를 암시한다.
시선에 대한 실험은 ‘촉촉투명각’의 실외공간에서 더 적극적으로 이뤄진다. 작가는 ‘촉촉투명각’ 주변의 건물과 또 그 건너편의 건물에까지 유령들을 설치했고, 이를 손전등으로 비추어 찾도록 유도했다. 말하자면 작가는 관람자에게 옥상에서 빛으로 도시를 탐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관람객은 작가의 작업을 찾는다는 명분하에 도시를 탐색할 수 있는 자율권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미 을지로의 골목이 어두워져 손전등 없이는 그 윤곽 정도만 구별이 갈 뿐이어서, 도시를 더듬는 손전등의 빛과 시선은 등치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는 안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티테이블 빔〉이 직접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관객은 ‘빛’이라는 매개를 통해 어두움을 뚫고 자신의 시선 자체가 가시화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실내의 유령이 여러 가지 버전의 시선을 보여줬던 것과는 다르게 실외에서는 하나의 시선에 대한 실험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등대가 된 것처럼 주변을 살피는 과정의 (빛으로 상징되는) 시선은 공격적이지도 않고, 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응시도 아니다. 빛의 시선을 탑재한 관객은 보는 주체가 되는 것, 사건을 ‘바라보는 이’로서의 자신을 경험한다. 어떤 목적의식이 분명한 시선, 발견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도록 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선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빠져나간 골목을 뒤적이는 시선은 도시-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시선이다. 대낮의 도시를 활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안 보이는 척, 안 본 척, 못 본 척, 보고도 못 본 척, 보이는데 안 보이는 척, 보고 있지만 안 보는 척 (해야)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시각적 자극에 일일이 반응할 수 없어 생겨난 생존 전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눈뜨고도 무엇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도시에서 《시티 유닛츠》의 경험은 시선이 본래 가지는 힘을 느끼도록 한다. 다만 작가의 설치물이 흩날리는 유령이라는 점이 영 마음에 걸린다. 을지로에 있을 법하지 않은 공간에서 점점 더 어두움을 더해가는 ‘촉촉투명각’에 출몰한 유령들에게 내가 홀린 것은 아닌가, 자꾸 손전등을 비쳐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