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나: 세계를 소생(reanimate)시키기
이연숙(리타)
우한나의 패브릭 조각과 ‘드로잉’은 아마도 (남성들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기억되는) 예술의 역사에서 변두리적인 위상을 점해 온 수공예적 생산물들의 직계 후손일 것이다. 대체로 여성 노동자들의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동작을 통해 제작된 물건(thing)을 뜻하는 수공예적 생산물들은, 오랫동안 (남성과 동의어였던) ‘작가’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독특성이 결코 출현할 수 없는 조야하고 소박한 미적 활동의 결과물로 여겨져 왔다. 우한나의 경우 패브릭은 결코 ‘전략적’으로 선택된 재료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수공예적 생산물들의 평가절하된 삶과 공동의 운명을 공유한다. 다시 말해 그가 패브릭이라는 ‘여성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한 그는 그것에 겹겹이 누적된 모욕의 역사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한나의 이름은 지난 수 세기동안 패브릭의 지위를 복권하거나 재전유하기 위해 각자의 방법론으로 분투해온 페미니스트 이론가와 예술가들의 이름들─미리엄 샤피로, 로지카 파커, 루이스 부르주아, 페이스 링골드는 물론이고 보다 나중 세대의 ‘쿨’한 여성 텍스타일 예술가들의 이름들─시오타 치하루, 사라 루카스, 사라 자파타와 같은 페이지에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패브릭에게 가해진 모욕이 그것의 미적 대상으로서의 자격을 정당하게 심문하게 할 만큼 치명적인 것이라 해도, 패브릭은 모욕만으로는 결코 찢어지지 않는다. 사실, 패브릭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중력에 저항 없이 매달리거나 늘어질 수 밖에 없는 패브릭은 무게 없는 가벼움과 한계 없는 유연함을 자신의 주된 무기로 삼는다. 패브릭은 기념비적 지위를 점하도록 제작된 무겁고 단단한 ‘전통적’ 조각들이 결국 무너지고 부서지는 동안 기껏해야 찢어지고 오물을 뒤집어 쓸 뿐이다. 찢어진 패브릭은 기우면 되고 더러워진 패브릭은 빨면 그만이다─이런 식으로 패브릭은 영구히 재생할 수도 있다. 마치 팀 버튼의 애니메이션 <크리스마스의 악몽>(1995)에서 탑에 갇힌 샐리가 창 밖으로 몸을 던진 충격으로 사지가 찢어지고도 곧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나 자신의 팔과 다리를 실과 바늘로 기우던 모습처럼 말이다. 샐리의 바늘질을 통해 바닥에 나뒹굴던 짚으로 꽉 찬 패브릭 덩어리는 금새 그의 신체 일부로써 재구성된다. 이처럼 바느질은 그 자체로는 무엇도 생산해낼 수 없지만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구멍을 내고 그들 사이를 접합시킴으로써 그들이 결코 이전과는 같지 않도록 만든다. 바느질을 통해 자신의 쓸모를 재지정(reassignment)받은 대상들은 사라지거나 망가지는 대신 자신 아닌 다른 것으로 변모한다. 마찬가지로 우한나의 작업에서 바늘과 실 만큼이나 필수적인 또 다른 도구인 가위는 단수인 대상을 복수로 나누고 쪼개는 내부 분열의 작업을 수행한다. 바느질과 가위질은 깎고 다듬고 부수기 위해 고안된 육중한 도구들이 행사하는 물리적인 파괴력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상을 자신의 내부로부터 변형시키는 “작고 반짝이는 무기”(장혜정)들의 부드러운 파괴력, 수동적인 공격성을 품고 있다. 우한나의 바느질을 통해 2차원의 패브릭은 3차원의 ‘조각’으로 변모하며 패브릭-조각으로서의 두 번째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이 그러한 삶을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말이다. 반복하지만 이들은 영구히 재생할 수 있다. 샐리의 ‘자가 수선’ 능력이 그를 결코 죽지 못하는 언데드(undead)로 살게 하듯이.
이처럼 바느질의 소위 ‘치유적’ 성격은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이를 되살려내는 ‘소생(reanimate)’의 무시무시함으로 전유될 수 있다. 생명을 뜻하는 라틴어 ‘anima(아니마)’를 어원으로 둔 영단어 ‘활성화하다, 움직이게 하다(animate)’에 반복을 뜻하는 접두사 ‘re’가 붙은 단어인 ‘소생하다(reanimate)’는, 당연하게도 정지된 이미지를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시각 매체의 한 장르인 ‘애니메이션’을 상기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2011년 학부 재학 시절부터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인 ‘토마스 기차’, ‘코끼리 덤보’, ‘매리 포핀스’와 같은 인물들을 전시를 통해 ‘되살려’ 내는 작업을 해왔던 우한나를 H. P. 러브 크래프트의 인물인 ‘리애니메이터(re-animator)’와 겹쳐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죽은 이를 소생 시키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인 ‘허버트 웨스트’와 마찬가지로 우한나 역시 패브릭-조각을 통해 지금 여기 없는 존재들을 전시장 내부로 불러 들이는 일종의 위치크래프트(witchcraft)를 실행한다. (한편, 『리애니메이터』는 매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직접적으로 참조하고 있으니 이는 애당초 죽은 자를 ‘되살려 내려는’ 열망이 마녀이자 ‘연금술사’들의 위치크래프트로부터 배양되었음을 표시하는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위치크래프트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던 여성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품었던 급진적 상상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레메디오스 바로와 레오노라 캐링턴이 “부엌의 연금술”(신혜성)로 명명될 수 있을만한 예술적 ‘유희’이자 실천을 통해 (여성화된 노동과 동의어인) ‘가사 노동’을 떠나지 않고 이를 혁명적이고 창조적인 이상의 실험실로 전유했던 것처럼 말이다. 서로의 꿈이라는 무의식의 ‘세계관’을 공유하며 황당하고도 환상적인 레시피를 작성했던 두 사람의 협업은 2022년 우한나와 정수정의 전시 《Feather》(실린더)를 떠올리게 만든다. 우한나와 정수정은 고대의 여성 창조신이 신화적 동물인 용을 돌보고 수호하는 창작 우화를 바탕으로 하나의 전시를 꾸렸다. 우한나는 (이런 ‘전설적’인 동물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죽임을 당했을거라는 전제 하에) 죽은 용의 눈과 내장을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패브릭-조각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이는 그를 위로하거나 다시금 ‘소환’하기 위한 제단(alter)의 공물인지도 모르겠다.
‘되살아남(소생)’과 ‘(되)돌아옴(소환 또는 귀환)’의 재귀적인 운동성은 우한나의 작업 전체에서 반복되어 발견되는 모티프 중 하나다. 우한나의 ‘공식적’인 이력에 따르면 그는 2016년 첫 개인전 《City Units》(촉촉투명각)을 통해 자신의 사물-조각들을 전시장이라는 ‘무대(stage)’ 위에 올리며 설치 미술의 형태로 일종의 연극 또는 제의(ritual)를 상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시에서 의인화된 사물-조각들은 도시의 소비 생활 양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추레하고 비루한 감정들을 대변하며 마치 항의라도 하듯 전시장 바깥, 즉 도시 전체를 쏘아 본다. 이러한 ‘쏘아 보기’, 요컨대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 할만한 유령적인 감정과 사물들의 응시라는 복수가 출현하는 물질적 조건으로서, 전시장은 단순한 화이트큐브 만은 아니다. 그 곳은 관객, 심지어는 ‘창조주’인 작가가 자리를 비운 뒤에야 마침내 떠들썩한 자신들의 ‘파티’를 시작할 사물-조각들의 빈 집이자 무단 점유지이기도 하다. 요컨대 2020년 작업 〈PAJAMA PARTY〉(《슈퍼히어로》, 인사미술공간)는 밤 새워 춤추고, 날뛰고, 공간 전체를 망쳐놓은 걸 갱(girl gang)들의 격렬함을 표시하는 흔적들로 채워졌다. 마치 불이 꺼진 뒤에야 찾아올 ‘진짜 주인’들을 위해 낮의 불청객들을 참아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전시장의 풍경 속에서 관객은 부재하는 누군가를, 지금은 없지만 곧 돌아올 누군가를 끊임없이 의식할 수 밖에 없다.
(남성형의 ‘영웅(Hero)’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반영웅’인 여자애들, 디오니소스의 ‘미친 여자’들(Mainades), 빗자루-시위대들, 허수아비-파수꾼들, 정령과 요정들, 덤보와 매리 포핀스, 신화적 동물들과 여신들, 누군가의 또는 우한나 자신의 (상실된) 신체 기관 등등. 이들은 그가 제작한 사물-조각이라는 일시적인 육체를 입고 전시장으로, ‘여기’로 자꾸 되돌아 올 것만 같다. 이미 죽은, 존재한 적 없는, 가짜로만 존재하는 이들은 사물-조각의 몸을 ‘빌려’ 불 꺼진 전시장에서 부스스 깨어나 밀담을 나눌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우한나의 작업은 한자 문화권에 일상적으로 퍼진 애니미즘적 믿음의 한 형태인 소박한 사물-신 또는 ‘요괴’(付喪神, 쓰쿠모가미)와 연속체적 관계를 갖는다. 일본의 민간 신앙에서 유래한 ‘쓰구모가미’는 오래된 물건에 신 또는 영혼이 깃들어 탄생하는 요괴다. 마치 산 것처럼 다뤄져온 사물에는 목소리가 생겨나고 다리가 돋아나 주인을 쫓아 다닌다는 ‘미신’처럼, 이름이라는 장소 뒤에는 어김없이 존재가 따라 나온다. 마치 수사법의 한 형식인 돈호법(apostrophe)이 그리 하듯이 말이다. 돈호법은 지금 여기 없는 무언가를 호명함으로써 담화 내에서 잠시 그러한 대상이 살아 있는 것’처럼’ 활성화(animate)하는 말하기의 한 전략이다. 우한나는 현실 세계의 논리에서는 비가시화된, 더욱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추방된 비인격적 존재자들을 전시장으로 불러들이며 잠시나마 그들이 (관객인 인간과 함께) 살아 있으며 전시가 끝난 뒤에도 살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일시적으로 활성화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떠오른다: 왜 우한나는 그들을 되살리고 싶어하는가? 왜 우리의 삶에 꿈을, 결코 삶과 공존할 수 없는 다른 세계를 개입시키려 하는가?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우한나의 현재를 품고 있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우한나의 학부시절 작품인 2010년 <Amateur monster generation BULMANTORO>과 2011년 <The Ghost>는 한데 모인 (작은 크기의 패브릭) 오브제들이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형)극에 가깝고, 2011년 <I see an elephant fly>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덤보>(1941)의 주인공인 ‘코끼리 덤보’를 ‘소생(reanimate)’ 또는 ‘해방’하는 제의라고 할 수 있으며, 같은 해의 <Inventing Numinose>는 관객의 (’초월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도발적으로 시험하는 일종의 소환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면적으로 보자면 그는 2011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어른 아닌 여자 ‘아이’의 백일몽을 시각 예술의 형식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상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마치 삶을 지연시키기 위해 꿈으로 도피하는 프로이트적 주체처럼. 그러나 그의 소망은 꿈과 현실의 자리 바꿈이나 양자 중 어느 하나의 우선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꿈과 현실을 ‘동시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능한 소망이다─동시에 고집스럽도록 ‘정의로운’ 소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꿈과 현실이 분리불가능한 방식으로 얽혀 있는 한, 둘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전부를 포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한나는 <덤보>의 클라이막스에서 무한히 추락해야 하는 화면 속 ‘덤보’의 운명으로부터 그를 ‘해방’하기 위해 <I see an elephant fly>에서 그를 불태운다. 이제 ‘해방’된 덤보는 더 이상 추락할 필요도, 죽음으로부터 아슬아슬하게 탈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실의) 불타는 덤보는 (꿈의) 추락하는 덤보를 위해 주어진, 가능한 다른 세계가 된다. 현실은 꿈을 통해, 꿈은 현실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풀려난다. 두 세계는 불타는 덤보를 통해 마주치고, 덤보는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다시 한번 태어난다.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 지어지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혹은 “이성”의 세계와 “비이성”의 세계(우한나의 말)를 동시에 출현하게 만드는 특수한 시공간, 혹은 ‘틈’을 (다시) 활성화하기. 어쩌면 이것이 우한나의 아름답고도 과격한 “리애니메이터”로서의 야심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장혜정, ”겨우 하나 가진”, 2020.
신혜성, “멕시코의 여성 초현실주의자들: 레메디오스 바로와 레오노라 캐링턴”, 기초조형학연구, 기초조형학학회,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