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선우 (큐레이터)
즉흥으로 춘 춤의 기록을 보는 것 같다는 게 <물라쥬 멜랑콜리크>의 첫인상이다. 작가는 푸른 물감으로 전시공간을 빙 둘러 낮게 결계를 친 뒤, 그 안에서 무보 없는 춤을 길게 추었던 것 같다. 화려한 옷을 입은 움직임 없는 마네킹과 나동그라진 신체의 일부, 동력 없이 서 있거나 달려 있는 오브제들로 이루어진, 연극이 끝난 무대처럼 보이는 정적인 공간에서 다름 아닌 즉흥춤을 떠올린 이유는 그것이 형식에 매이거나 계획을 따르지 않고 만들어진 행위 같아서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선택이 쌓여 이루어진 행동의 결과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전시공간 구석구석을 빈틈 없이 메우고 있는 작가의 분방했을 흔적들을 마주하면, 거기서 움직임을 추측하기보다는 매 순간 내려졌을 선택들을 더듬게 된다. 이를테면 크고 작은 그림을 걸거나 기대 놓은 뒤, 주변의 벽에 색색의 붓질을 더해 화면을 연장하고, 고운 공단을 땋아 금줄을 치고, 천을 잘게 잘라 흩뿌리고, 가벽을 이런저런 모양으로 썰어내고, 잘려나간 단면에 청록색 망사를 잔디처럼 삐죽삐죽 심는 부분들에서 작가가 내린 선택의 순간을 따라가 보게 되는 것이다. 전시공간의 주인처럼 서 있는 <Moulage Mélancolique>(2019)나 곳곳에 놓인 <Bag with You>(2019)를 보아도, 넥타이의 어디까지를 꿰매고 어디까지를 자를지, 폭신한 털 옆에 까슬까슬한 천을 어떤 색 실로 봉합할지, 천의 가장자리는 감치기로 마무리할지 그대로 둘지, 머리칼처럼 탐스러운 공단 줄은 세 줄로 땋을지 네 줄로 땋을지, 가방끈과 몸통의 비율은 어떻게 할지, 옷걸이 끝에 달린 붓에 무슨 색 물감을 묻힐지 등, 어림으로 헤아려 보아도 작가는 공간 안에서 수만 번의 선택을 내렸을 듯하다.
이러한 선택과 결정은 색채학이나 황금비에 기대거나 사전에 계획한 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전시공간에서 직관적으로 내린 것이다. 다음 번 다른 공간에서는 아마도 다른 결정을 내릴 것이다. 따라서 전시장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곤 관객밖에 없었지만 이 전시는 재상연되지 않는 일종의 퍼포먼스와도 같았다. 또한 이런 직관적인 선택은 주변의 공간이나 발맞추는 음악에 따라 다음 번 나아갈 방향과 그때에 취할 몸의 모양, 움직임의 길이와 횟수를 결정하는 즉흥춤에서의 선택의 문제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그런 즉흥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아무리 계획과 규칙을 빡빡하게 따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정해진 덩어리들의 틈을 유연하게 메우는 것은 대개 즉흥적인 선택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일상적인 ‘말’이다. 무언가를 암송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꺼내 그때 그때 조합하는 것이 바로 말하기일 테니 말이다. 선택의 대상과 목록이 자기에게 이미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한나의 선택은 ‘말하기’와 비견할 수도 있다. 작가는 직관을 유려하게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다던가,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곤란해지는 일에 처하지 않기 위해 평소 부단히 노력한다. 각종 질감과 색의 재료를 모범적으로 수집 분류하고, 그것을 언제든 끄집어 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잘 짜서 말리고, 자르고, 꿰매고, 말고, 비슷한 것들끼리 정돈하기를 성실하게 반복한다. 그리하여 어느 패션브랜드의 자재실이나 취향이 좋은 양품점처럼 보이는 작가의 작업실은 마치 평소에 부지런히 책을 읽어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가 정돈되어 있는 누군가의 머릿속이나,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단련해 온 무용수의 몸, 혹은 세상 모든 색을 다 모아다가 충분히 짜서 말려놓은 화가의 팔레트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단단하고 촘촘한 바탕 위에 만들어진 직관의 풍경은, 사전을 뒤적이지 않고도 아름답고 정확한 단어들로만 유창하게 써 내려간 즉석 편지처럼 자유롭게 이지러져 있으면서도 철저히 통제된 듯한 인상을 준다. 공간의 시작점, 스프레이페인트로 친 결계가 없는 벽에 3 개의 페인트 통을 고이고 기대 놓은 의미심장한 제목의 대형 페인팅 <지휘자 시점>(2019)의 단단하게 묶인 매듭과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끄트머리, 비교적 비어있는 가운데에 비해 구석구석 빈틈 없이 채워진 화면의 구조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작가의 선택과 말하기의 방식을 대변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