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용 네이버매거진
우한나 작가는 드레스나 장식에 쓰일법한 패브릭이나 리본 등으로 입체적인 조각을 주로 만든다. 작가의 오브제는 그저 독립된 작품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를 가진 캐릭터로 만들어지곤 하는데, 작가의 전시에서 이 캐릭터를 중심으로 펼쳐진 드로잉, 회화, 영상 등은 서사의 장치가 되고 전체는 신화의 주인공이나 사건의 목격자가 등장하는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이곤 한다.
우한나 작가의ᅠ개인전 <물라쥬 멜랑콜리크 (2019.10.16.~11.15, 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빗소리가 들리고 우울한 어느 날로 연상되는 방 한켠에 들어서게 되었다. 방의 벽 너머에서 진득한 물감이 새어 나오고 있다. 옆방은 그림을 그리는 이의 작업실일까.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벽을 따라 좁은 복도를 지나야 한다. 복도의 한쪽 벽엔 큰 그림이 있다. 건조를 위해 복도에 잠깐 내놓은 작품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에 사용한 듯한 페인트 통 위에 올려져 있다. 좁은 복도라 그림 전체를 보기는 어렵지만 평소 ‘관람자 시점’에서는 자세히 보이지 않던 덧칠한 물감의 두께, 스프레이의 망점 그리고 캔버스 위에 달린 리본 매듭이 좀 더 자세히 보인다. 머뭇거리던 묘사나 주저 없는 자유로운 붓 터치가 모두 자세히 보이는 가까운 거리이다. 보통 작품을 제작할 때 작가가 서 있었을 거리기도 하다. (지휘자 시점, 2019) 옆방 입구에 다다르는 벽은 영화 세트처럼 낮게 잘려있어서 이미 슬쩍 안이 보인다. 리드미컬하게 잘린 벽 사이로 다른 세계가 겹쳐진다. 코너를 돌면 펼쳐지는 본격적인 세계에는 작가의 아름다운 취향이 가득 차 있다. 작가는 이 재현들을 그저 자신의ᅠ욕망이라 표현했지만, 오뜨 꾸뛰르에서 받은 예술적 영감부터 작가의 마음을 끄는 소재의 촉감 그리고 어떤 질료와 색감으로 표현하고 싶은지 또 그 창작의 마음이 어떤 일렁임으로 존재하는지까지 작가의 지향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매혹적인 방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방에서 코너를 돌아 즐거운 상상의 방으로 진입했다. 이 방에 있는 드레스를 비롯한 아름다운 작품들은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직관적으로 좋다고 느꼈던 것들 그리고 무엇이든 그리거나 만들고 싶던 창작 열정이 시작된 순간에 대한ᅠ솔직한 고백 같기도 했다. 공간을 나누고 있는 벽이자 작품인 ‘듀플렉스(duplex)'는 물리적으로 공간을 분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분리의 벽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이 둘을 완전히 흑백으로 나누지 않는다. 벽은 상황을 연극적으로 만들지만, 그 이면을 무대 밖으로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입체적으로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낮은 벽에 그려진 몽글한 감정들 너머로 저쪽의 뜨거운 욕망이 겹쳐 보이는 섬세한 배치는ᅠ이미지가 파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탱한다. 지금은 슬프지만ᅠ건강한 상상에서 시작된 내일이 다시 오늘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입장 순간부터 오감을 동원해 장소를 감각하게 만든 이 공간 전체가 전시가 끝나면 사라질 아쉬운 하나의 작품이고, 감상의 동선도 작가의 방 구석구석을 보는 것에 가까웠다.
우한나 작가의 작품에서 재현된 세계나 캐릭터들은ᅠ판타지적이지만 현실에서 용도를 다한 물건이 작업의 소재로 사용되며 쓱 들어오곤 한다. 욕망과 상상을 긍정하지만, 그 욕망이 어디에 기인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현실에 발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매듭을 짓거나 어딘가에 묶이지 않으면 기능과 미를 실현할 수 없는 것들(리본, 넥타이)과 혼자서는 오롯이 서 있을 수 없는 것들로 작품이 만들어 진다(흐느적한 촉감의 패브릭, 얇고 긴 막대기). 이들은 무언가에 기대고 서로를 도와야 진짜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삶의 이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무겁게 느껴지는 현대미술 작품들 사이에서 그저 직관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고자 하는 관객들이나 아이들에게도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미감을 구현하며ᅠ인간이ᅠ예술-창작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왜 하기 시작했는지 생각하게 해준다. 가장 근본적인 것들을 잊지 않는 것이 사실 가장 정치적이고 또 의미 있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