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주
낮의 을지로는 기계 소리가 리듬을 만들며 바쁘게 돌아가지만 밤이면 사람의 움직임은 잦아지고 소음은 조용히 가라앉는다.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무렵 촉촉투명각의 불은 밝아진다. 촉촉투명각은 을지로 한 가운데에 있는 작가 우한나의 작업실이자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린 공간의 이름이다. 인쇄소가 있는 1층을 돌아 복잡한 구조의 벽돌 건물 어딘가의 입구를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촉촉투명각이 나온다. 다시 찾아간데도 쉽게 입구를 알아내지 못할 것 같은 을지로 좁은 골목 사이라 길을 안내할 토끼라도 필요할 것 같다. 전시가 시작되는 실내 공간은 평범한 흰색 벽을 하고 있지만, 작품들은 문 뒤로 나 있는 옥상으로 이어진다. 마치 배의 갑판 마냥 앞으로 길쭉하게 뻗어나온 테라스이자 옥상인데, 안경처럼 동그란 물체가 도깨비불이 돌아가듯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있고, 양쪽 눈에서 빛이 나오는 소녀의 두상 조각이 도시를 등대처럼 바라보고 있다. 옥상의 담벼락에 기대고 몸을 길게 뻗으면 눈 아래 인근 건물들의 지붕이 펼쳐지고, 멀리 고층건물의 윤곽선들도 보인다.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시야가 뻗어가는 곳곳에 작업들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녁 7시부터 밤 11시까지만 문을 여는 이 전시는 어두운 바깥에 숨어 있는 작업들을 볼 수 있도록 손전등을 마련해 두었다. 천천히 탐색을 시작하면 주변 건물들의 옥상과 벽에 설치한 작업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동그란 불빛의 윤곽 안에서 형체를 찾는 일은 마치 동굴벽을 훑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암석들 사이를 긁고 드러낸 벽화를 찾아내듯이 깃발처럼 흔들리는 사람이나 얼굴 모양의 얇은 비닐들과 날아가지 않게 모래주머니로 괴어 놓은 형상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이 같은 형체들은 마치 어깨에 붙어 따라다니는 배후령이나 유령의 물질을 인화하여 드러난 것 처럼 도시의 표면에 생경하게 겹쳐져 있거나 간신히 붙어 흩날리고 있다.
이 전시에는 크게 두 가지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먼저 앞서 임의로 ‘형체’라고 부른 것들로, 눈의 자리에 구멍이 뚫려 있고, 팔 다리의 사지는 겨우 만들어져 있거나 혹은 얼굴만 남아 있는 것들이다. 실내공간, 옥상과 그 주변 곳곳에 놓인 이 형체들은 그 기본적 형태가 너무나 단순해서 서로 더 유사해 보인다. 동일한 캐릭터의 반복이거나 최소한 동족들의 집합같다. 눈동자가 없는 이들에게서는 특별히 어떤 감정을 읽을 수도 없고 몸체는 너무 얇거나, 혹은 스티로폼으로 대충 깎아 놓은 것이라 위험도,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전시에서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은 모두 앨리스이다. 야외에 놓인 두상 조각의 앨리스의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눈동자 대신 전구를 끼워 넣은 이 소녀에게서도 감정과 표정은 읽히지 않는다. 전시장 내부에는 고풍스런 받침대 위에 놓인 세 소녀의 두상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데, 이들 역시 얼굴 모습, 얼굴 색과 모양이 모두 다른 앨리스이다. 긴 머리카락만이 앨리스임을 알아보게 할 뿐 각기 모두 다른 디테일을 갖고 있다. 작가는 이 앨리스를 드로잉으로 수 없이 그려 하나의 책으로 묶어내기도 했는데, 어느 페이지의 앨리스도 똑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았다. 가장 익숙한 도상으로 알려진 파란 리본과 파란 원피스, 하얀 앞치마의 노란 머리의 소녀가 아니라 그저 ‘앨리스’라는 하나의 이름만 남고 수 없이 많은 모습과 성격을 부여 받는다. 이 전시의 두 캐릭터는 텅 빈 기호처럼 존재한다. 작가는 작업마다 이 캐릭터들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거나 아예 성격을 제거해 버린다. 텅빈 기호로서의 캐릭터들은 수많은 변주의 가능성을 갖게 된다.
작업에 등장하는 형체들에서 눈의 자리를 종종 도려내건 것은 오히려 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실내에 설치된 작업 중 하나인 <환상결론>에서는 눈알이 캐릭터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 눈이 바라보는 상들이 실에 매달린 형체들로 늘어서 있다. 특정 시간 안에 포착되어 흘러가는 이미지들이 여기서는 마치 모빌에 매달린 것처럼 색색의 선과 깃털, 크고 작은 형상들로 축적되어 있다. 마치 동공이 받아들인 이미지가 망막에 맺히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각 원리의 분석과 같이 피부와 눈, 그리고 이미지가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 실내 공간의 눈이 바라보는 이미지들은 관객이 옥상에서 바라보는 바깥의 풍경과 겹쳐진다. 외부에서 경험하게 될 도시 풍경과 시선의 관계가 여기서 모형으로 축소되어 있는 것이다. 실내 공간의 설치, 옥상 위의 설치, 그리고 건물 밖의 설치, 이렇게 세 개의 단락, 세 개의 확장하는 파동의 모습을 갖추면서 전시는 다양한 보기의 관계들을 예시한다. 빛의 조절은 보기의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실내의 빛, 야외의 어둠, 도시가 내뿜는 빛, 음영을 비추는 손전등과 같이 여러 단계의 빛의 맥락들이 등장한다. 바라보는 위치 역시 변주되고 있다. 작품이 놓여진 세 개의 공간이라는 설정 외에도 접근하거나 발견하기 쉽지 않은 창문 밖에 작품을 놓아두거나 시야의 아주 먼 곳까지 형체들을 배치하여 보는 거리와 위치의 다양한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모니터는 거울을 마주보고, 캐릭터는 화면을 마주보는 등 시선의 교차와 반사도 빈번하다. 연약하고 거친 재료로 만들어진 이 조형들이 텅 빈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비해 조금 더 구체적인 서사를 보여주는 것은 설치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영상들이다. 특히 전철역의 플랫폼 기둥에서 반복하여 발길질을 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에서는 답답함이나 무력한 분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전시 <시티 유니츠>의 작업들은 서울 한복판의 풍경과 겹쳐져지면서 도시 생활의 우울과 무력을 내비치지만, 동시에 이를 짐짓 대수롭지 않게 분해하고 있다. 눈의 자리가 뚫린 형체들을 바라보는 대신, 둥글게 뚫린 눈으로 보기를 상상해 본다. 너무나 시각 정보가 많은 도시의 중심부에서 일부러 눈의 초점을 흐려버리거나 마주하기 어색한 시선을 피하는 상황을 생각한다. 손전등 불빛이 비추는 도시의 옥상 위에는 바다의 잔물결이, 검게 둘러쳐진 빌딩 숲에는 동굴 속 잔상이 맺힐 수도 있다. 이렇게 나의 주관적인 보기의 방식을 바꾸면 적당히 소화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각 정보들만 남고 다른 것들은 조각이 날 수도 있고 추상으로 잔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걸러버리고 나면 좀 숨을 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