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 (안무비평)
아이온의 시공간, 혹은 “나는 조물주여서 부끄럽다”
우한나 작가의 이 전시 풍경 속에 감도는 것을 그리스적 기원을 가진 아이온[Aion]에 적셔서 보는 것은 어떨까. 시간과 관계가 있는 아이온 개념은 더 이상 근대라는 성가시게 발목을 잡는 적수에게 오랫동안 상대가 안되어 왔었지만, 그 근대의 시간 프로그램이 필연적으로 소멸되면서 굴종된 상태였던 아이온은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나타날 기회를 잡았다. 우한나 작가의 설치 미술과 시공간은 신적인 나르시시즘의 뉘앙스가 감돌고 있는데, 가령 오렌지톤과 퍼플톤 사이의 변증법 — 물론 퍼플톤으로 수렴된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 과 기분, 액체적 가변, “이것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순간의 정확한 기울기, “나는 신이다” 라는 니진스키류의 각성, 수력의 힘을 포함한 휴대용 구름처럼 응결된 사물화 등등 표현되어 있다. 이 표현적 세계는 신의 자기 전개처럼 인간의 역사라는 층위보다는 원형적 시간이라는 층위에서 일어난다.
아이온은 이 원형적 시간을 상대하는 신격으로서 우주를 전부 포괄하려는 궤도나 원, 어떤 도상이나 상징, 또한 그것들의 복합적인 산물이 ‘무한히 긴 시간’을 뜻하는 동시에 ‘한 시대’이기도 하다. 시간의 신 아이온, 이 신격은 지금 우한나 작가에게 임하여 다시 한번 자기전개한 세계의 풍경을 드러내려 한다고 하면 지나칠까. 그러나 이러한 과대망상이야말로 본래 조물주였던,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티마이오스라는 공작신이었던 예술가의 지위, 위상, 스탠스가 뚜렷해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런 면에서 니체는 아이온처럼 생명의 진화 궤도는 공작될 수 있다고 믿었던 라마르크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참으로 적극적인 하나의 조형적 힘의 — 즉 변신의 힘 — 현존을 예감한다.”
#1. “누군가가 저 중간세계의 예술가적 가상을 치워버렸다면, 사람들은 숲의 신, 즉 디오니소스적 수행자의 지혜를 좇아야만 했을 것이다.” (니체, <유고집> 중에서)
우한나 작가의 아이온은 디오니소스로 서서히 밝혀진다. 전시장 심부에 절묘한 기울기의 모바일이 설치되고 그 아래로 작가가 만든 기이한 따뜻함과 형태의 사물이 놓여 있는데, 이는 포도이며 포도 이상의 사물인 동시에 포도를 매개로 한 디오니소스 축제까지도 암시된다. 디오니소스의 아이온적 시간은 죽음을 거치는 것으로서 그 죽음의 치열성은 재생의 약속보다 가혹한 것이다. 비극의 철저한 가시밭길, 육신의 갈가리 찢기는 고통은 감내키 어려운 것으로서 어쩌면 이 전시의 벽면에 가득한 표현주의적 오렌지톤 색채 중심의 퍼포머티브-구성에서 이를 감지할 수 있지 않은가. 작가 스스로 그 신지학적 느낌이 무의식과 연합하여 뿌려진 듯한 벽화의 파노라마적, 스펙트럼적 전개를 좋아하면서도 그 하이라이트에 자리잡은 레드톤은 스스로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마치 보르헤스의 단편에 나오는 에피소드, 즉 그림 속의 호랑이를 불러낸 환술사가 자신이 만든 호랑이 판타지에 스스로 무서움증을 느끼고, 그러자 호랑이가 그 환술사를 잡아먹었듯이 그 비슷한 사례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 죽음본능 — 디오니소스의 죽음은 죽음 너머로의 비상과 재생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 의 색채적 콤포지션, 그러면서 벽화가 자연스럽게 좌에서 우로 흐르는 가운데 콤포지션의 연장선상에서 커튼을 걷고 싶은 충동 아래로 죽음본능이 가져오는 약속된 선물, 즉 포도와 태양이 커튼 너머에 기다리고 있음을 관람객들 역시 향수하게 된다. 이는 굉장히 잘 짜여진 이미지-서사 플롯이며, 그 플롯이 보다 풍부한 스토리를 개방하는 뛰어난 한 사례로 보인다. 우한나 작가는 학창 시절 이창동 감독/교수로부터 <시학> 수업을 통해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서사의 맛을 배웠다고 하는데, 그 맛은 일종의 ‘시학적인 것의 음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자꾸만 포도를 강조하는 것에는 이 시학적인 것의 맛이라는 부분이 미학적으로 도드라져 나올 뿐만 아니라 이제 전시장 전체의 유체적이며 가변적인 풍경 속으로 범람하여 온통 전체가 퍼플톤의 할루시네이션처럼 화해간다. 이는 예민한 다른 평론가의 촉으로 전해진 풍문의 언어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2. (...) 사람들은 담쟁이덩굴로 엮은 화환 그리고
떡갈나무 가지와 꽃이 만발한 메꽃 잎으로 장식한다.
한 처녀가 주신 바쿠스의 지팡이를 집어들고
바위를 치면, 샘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한 처녀가 지팡이로 땅을 찌르면,
신은 포도주의 샘이 솟게 한다.
_디오니소스 축제의 송가 중에서
자, 이제 우한나 작가라는 아이온적 신격은 서양으로 치면 최소한 15세기 이전의 시대착오를 범하는 신으로 보인다. 조물주적 성격은 음과 양, 좋은 것과 나쁜 것, 사랑과 증오, 성스러움과 속됨이 저 전시장에 보이는 수많은 매듭들, 이중의 새끼꼬기의 산물들, 마치 뱀들이 저마다의 생명적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꼴릴 대로 꼴려서 이중의 나선구조로 만들어지는 생명기호처럼 “꽃잎의 안짝과 바깥짝”(강신표)을 천연덕스럽게 보여주는 작업에서 적나라하다. 큰 캔버스 그림 위를 묶고 있는 매듭들은 그림을 근대적 양식으로부터 해방시켜 본래 서판 형식 — 즉 자신을 들여다보는 50개의 거울은 추악하지만, 100개의 거울은 새로운 참신함을 드러낸다는 짜라투스트라의 비전이 응축된 형식 — 의 권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과대망상적 평가지만, 그러한 의지, 그러한 지향성은 서판 속에 아이온적 우주를 담고자 하는 것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우한나 작가의 시간적 잠수가 궁금하기 짝이 없는 법인데, 그는 르네상스도 아니고 바로크도 아닌, 그 둘 사이의 순간적인 섬광처럼 환해졌다가 문화의 지형 안쪽으로 단층화되어 잠복해버린 마니에리슴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 같다. 벽에 그려진 이중새끼꼬기의 그림과 벽이 헝겊으로 그로테스크하게 제작된 이중새끼꼬기의 오브제 그리고 그 위치도 벽면뿐만 아니라 캔버스, 옷걸이, 천정 등등 온갖 공간적 차원의 활용이 주목할 만하다. 마니에리슴은 하나의 텅 빈 타블로[tableau] -- 즉 우주의 축도판으로서의 테이블 — 위에 어떠한 사물들의 배치, 구성, 결합술에 의해 우주 자체가 포도송이처럼 응축되어 실재할 수 있다는 사상이며 사조이다. 이 발상은 동양에서는 ‘화엄’[華嚴] -- “아주 작은 냉이꽃 한 송이” 속에 꽃밭이 들어 있고, 그 꽃밭은 우주 전체이다 라는 홀로그램적 발상의 개념 — 의 생각에서 충분히 연관될 수 있는데, 불행히도 화엄은 그 자체가 완성되어 있어서 인간의 손길과는 무관했다. 마니에리슴은 그 어원 속에 manu, 즉 “손”이 깃들어 있어서 인간의 손맛이 아니면, 우주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기묘한 전제가 있다.
#3. “표면의 분해를 통해 그것은 거의 추상적인 인상을 환기하는 것이다. 볼록 거울로 인한 원근법의 왜곡 속에서, 화면의 전경에는 해부학적으로는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거인증에 걸린 듯한 커다란 ‘손’이 차지하고 있다. 방은 어지러울 정도로 경련 같은 움직임 속에 펼쳐져 있다.” (구스타프 르네 호케, <미궁으로서의 세계> 중에서)
우한나 작가의 아이온적 공작이 진행되는 손의 문제, 무엇인가를 조물하려고 할 때의 머리의 문제보다 어쩌면 이 커다랗게 인플레이션 되어버린 손의 지능, 손의 각성이 마니에리슴의 쟁점인 동시에 늘 발생하는 논란의 거처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이다” 라고 선언하는 우한나 작가의 경우, 머리와 손은 단순히 호모사피엔스 타입으로 연대되어 있는 브리꼴라주 형식의 쓰임이 아니라 손 자체가 우주의 질감을 매만지면서 포도즙을 쥐어짜면서 동시에 저 아득한 돌연변이로부터 신적 권능을 행사하는 이단적인 엑스맨 ‘마그니토’처럼 모든 것을 자성화[磁性化]하면서 스스로 “손의 신”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는 다분히 관념적인 어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한나 작가의 경우 대단히 실재론적 설명이며 전시장 풍경 속으로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마니에리슴의 첩첩과 겹겹의 결합술적 풍경 내부의 비밀들이 마늘의 속껍질을 벗기듯이 하나씩 하나씩 나타난다. 우한나 작가는 마니에리스트로서 보기 드물게 색채의 본질에 극히 예민하기 짝이 없어서 작품들의 나열, 배치, 수순, 인접성에서 극한치를 달린다. 포도는 매달린 것의 색채와 떨어진 것의 색채가 다르며, 그 퍼플톤과 레드톤은 이미 포도의 명운, 그 짧은 일대기 속에 여며져 있다. 나란히, 동시에. 마치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가 과거세의 붓다와 그의 숙적인 데바닷타라는 것처럼. 이 양가성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한나 작가에게는 디오니소스의 죽음 형식이 깃든 한 가지 경우라고 할까. 즉 레드톤에 대한 본능적인 무서움, 뱀에 이끌리면서 고양이를 펫샵에서 사오는 우발성 같은 것.
한편, 뱀 표피의 문양, 포도송이의 헝겊적 제작, 붓, 보드라운 털 소재의 깔개, 별과 초승달이 그려진 병, 레드에 가까운 퍼플처럼 보이는 색채의 천, 작가가 아끼는 스프레이 형태의 금속용기 그리고 재봉틀... 이러한 구성이 역시 보라색 커튼 곁의 바닥에 펼쳐져 있다. 마치 “나는 고통도 경험도 순환되는 이 세계가 증오스럽다.”(김유택, 소설 <보라색 커튼> 중에서) 라는 발언처럼 여기에는 모순적이며 역설적인, 서로 등질 수도 있는 사물들의 상성과 극성이 어울렁더울렁 하면서 섞여 있다. 아니, 섞여 있지도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마니에리슴의 세계는 우한나 작가에게 아주 자연스러워서 그 우주적 구성은 무의식과 본능에 따른 가늠과 헤아림, 손의 문제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 이미 나타난 후에는 그 자체가 다른 무엇도 아닌 ‘이것임’의 영역이다. 필연적인 느낌의 가변, 필연적인 느낌의 유체적 흐름, 필연적인 느낌의 마늘... 등등 디오니소스의 죽음 너머에는 다른 생의 한가운데가 있다는 것을 우한나 작가의 비의에는 조물주적 조형 세계를 초월하여 가르쳐준다.
#4. (...) 삶을 환히 밝혀주는 붙붙는 표피여,
나는 부끄러워 눈물 흘렸다. 내 꿈은
나에게 입맞추어 주었다.
(장석, 시 <풍경의 꿈 1> 중에서)
“마늘의 색깔을 아느냐” 라는 우한나 작가의 질문 속에는 마늘이 마치 온 우주를 다 담은 크리스탈처럼 그 안의 징후적 색채 감각이 홀로그래픽하게 유영하는 것처럼, 마치 꿈꾸거나 환각에 휩싸인 것처럼 아련한 데가 있다. 그 아련함은 부끄러움과 이웃인데, 전시장 안쪽에 자리한 어떤 일상적인 장소로 설치된 장면이 그러하다. 작가 자신이 쓰는 사물들과 거울, 시계, 꽃병 등이 놓여진 그 테이블은 마치 동굴 속으로 되돌아간 짜라투스트라가 꿈 속에서 어느 아이가 비추는 50개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소스라쳐 놀라면서 자신의 “나는 신이다” 라는 각성이 다시 한번 반성 속에서 순환하는 장면처럼 여겨진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왜 신의 몫이어야 하는가.
다시. 마늘색이 진짜 예쁘다는 것인데, 그 껍질들을 벗기면서 마지막 언저리에서 남은 껍질이란! 메이플스 옐로우, 나폴리 옐로우, 무슨 옐로우 등등이 복합적으로 감도는 그 선상은 아마도 하나의 문이 설치된 공간적 비유처럼 여겨지는 대목이 있다. 이 편에서 저 편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이 있는 공간... 거기서 작가의 실존은 한 발은 이 편에 놓여 있고, 또 한 발은 저 편에 놓여 있어서 오도가도 못하는 걸림과 들림의 위치인 것. 그러한 살림살이, 그러한 형편의 내면이 고스란히 전시장의 풍경의 꿈으로 온전히 현상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마늘색은 육쪽 마늘의 전체상으로 생각되어야 하고, 문지방 위에서는 그 생각이 두 개의 발을 딛고 “뒤를 돌아보라” 라는 수행문으로 변주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동시에 “아래를 보라” 라는 것도 함께. 우리는 우한나 작가의 독특한 신격적 각성, 그 위상학적 작업 방식 그리고 융합의 신비를 함께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신임을 우리에게 천명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