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현 (전시기획)
우한나는 그동안 패브릭을 주재료로 서사가 있는 공간을 만드는 설치 작업을 해왔다. 생김새가 제각각인 막대가 군집한 풍경으로서 《스윙잉》(왕산로9길24, 2018),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작품이 존재하는 공간으로서 《물라쥬 멜랑콜리크》(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19), 예측불가한 여성 청소년의 파티 장소로서 <파자마 파티>(인사미술공간,2020). 이처럼 혼란과 무질서가 아름답게 펼쳐진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한나의 주특기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풍경의 매혹에 압도되어서, 그것을 구성하는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놓쳤는지도 모른다. 《우한나 : 마 모아띠에》는 시점을 옮겨 그러한 공간을 구성하는 작고 아름다운 것들에 주목하기를 요청한다.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놓은 자수, 패턴을 맞춰가며 곱게 짠 그물, 색과 형태를 고려해서 묶은 리본. 이 작은 세부들이 이 전시의 주인공이다.
나의 반쪽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대부분 신체 장기의 형태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한쪽 신장이 수축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개인적 경험에 기인하여 신체 장기의 형태를 작품으로 만드는 일을 지속해왔다. 신장에서 시작한 작업은 심장, 소장, 간, 남성기, 난소, 반고리관 등 다양한 신체 장기의 독특한 형태를 구현하는 것으로 집착적으로 확장되었다. 마치 잃어버린 신장에 대한 끝없는 애도인 것처럼 신체 장기에 몰두했다.
이번 전시의 부제 ‘마 모아띠에(Ma Moitié)’는 바로 이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상실감을 의미한다. 태초에 한 몸이었던 여성과 남성이 신의 형벌로 분리된 뒤 영원히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한나의 작품과 닮았다. 내 것이지만 내가 보거나 만질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부터 소외되고, 그러한 소외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상실감을 동반한다.
우한나의 작품에서 이러한 근원적인 상실감과 그리움은 다양한 색과 재질의 패브릭으로 구현된다. 하늘색 빛의 실크로 된 심장, 리본을 단 보랏빛 소장, 민트색으로 빛나는 복부는 우울함을 감추고 발랄하고 경쾌한 리듬으로 반짝인다. 그러니 그 밝고 우아한 표면에 속아서는 안 된다. 돌이켜보면 진정한 우울과 고독은 비가 오는 흐린 날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화창한 봄날에 나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다. 우한나의 장기가 애써 밝고 명랑하게 자신을 뽐내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상실감의 증거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움은 아름다운 형태로 재탄생한다. 우한나는 집요하게 아름다운 형태를 창조한다. 이 비정형의 물체들은 분명 신체 장기를 닮았지만 원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거대한 크기와 화려한 색 조합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이기도 한 <Abdomen> 시리즈는 제목을 보기 전까지 그 정체가 잘 가늠되지 않는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이 대형 오브제는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색상이 섬세하게 배치되어 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그 안을 채우는 것은 복부를 구성하는 지방이나 종양, 혹은 해양 쓰레기 같은 것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매끄러운 민트색 실크와 은은한 꽃무늬 패브릭으로 재탄생한 복부 지방은 여전히 아름답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직조 방식은 우한나의 회화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의 회화는 어떤 주제를 정합적으로 구축하는 대신에 직관적으로 불규칙한 비정형의 형태를 통해 시각적인 균형과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전시의 메인이 되는 회화 작품 <Hollow>는 텅 비어서 공허한 공간의 신성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러한 의미는 논리적으로 전달되는 대신에 파란색과 초록색, 흰색의 형상을 불규칙하지만 균형 있게 배치함으로써 만들어지는 형태로 표현된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혼란스럽고 즉흥적인, 무질서하지만 아름다운 상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어쩌면 혼란과 무질서의 공간에서 아름다움을 구축하는 우한나의 방식이 보다 작은 세계 안에 조직된 것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디자이너 우한나
이번에는 작은 반짝이는 작품 하나를 골라서 하얀 배경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자. 화려한 패턴의 패브릭과 광택이 있는 민무늬 패브릭이 섞여 들어가고, 섬세하게 위치를 잡은 매듭이 묶이고, 신중하게 바느질이 된 이 오브제들은 아름다운 것으로서 예술품의 역할에 충실하다.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 말한다. 그리고 아무 용도도 지니지 않은 조각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손으로 드는 가방이 되거나 허리에 두르는 장신구가 된다. 무용한 관조의 대상으로서 좌대에 올려지기를 거부하고 자꾸만 손으로 만져지기를, 몸 어딘가에 달라붙기를 희망한다. 이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이것들이 조각을 위한 좌대보다 더 고상한 자리에 놓이기를, 더 빛나는 자리에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예술품’이라면, 이미 그 자리에 가 있는 것 아니냐고. 그보다 더 고상한 자리가 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 말은 이론적으로 맞다. ‘예술’ 개념이 발명된 이후로, 그보다 고상하고 격식 있는 자리는 없다. 그러나 지금 현재 우리의 시점에서 미술이 정말 그런 자리에 있는가. 동시대 한국 미술계는 종종 ‘폐허’에 비유된다. 여러 의미가 함축된 이 비유의 한 축에는 이곳에는 더 이상 자본이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자본은 다른 곳에 있다. 매끈하게 눈이 부시는 와이드칼라 광고판에서, 패션 잡지의 화보에서, 명품 매장의 화려한 디스플레이에서 우리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매력적인 상품.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완벽한 마감을 지닌 상품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한다. 이처럼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화려하고 완벽한 스펙터클을 지닌 것들이 어떤 높은 자리에 올라 있다. 17세기 귀족들의 손에 쥐어진 명화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미술이 아니라 그런 것들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대에, 우한나의 아름답고 반짝이는 오브제는 자꾸 말을 걸어온다. 사실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한다고. 자꾸만 반짝이면서, 빛을 내면서 말을 건다. 비록 이미 사용되었던 천을 재활용한 것이지만 이보다 더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것을 보았냐고 묻는다. 사실 자신은 들 수도 있고, 멜 수도 있고, 장식처럼 얹어 놓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단지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형태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사유와 철학을 담고 있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반짝이는 오브제들이 가장 고결하고 격식 있는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 더 많은 이가 열광하고 더 비싼 값에 팔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오브제 뒤에 있는 우한나가 그에 걸맞은 자리에 가 있기를 바란다. 이 전시의 제목이 된 ‘우한나’는 부와 명성, 대중의 사랑과 평단의 인정을 모두 가진 디자이너다. 나는 재능 있는 미술가들이 그렇게 되기를, 더 많은 관심과 인기를 누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