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하다 회전하는 변화
해주: 2018년의 개인전 <스윙잉>에서 출발한 <스윙잉 2021: Relaxed Hurricane>이라는 작업을 한참 진행 중이다. 그 작업에 대한 얘기들을 해 보면 좋을 것 같다.
한나: 느슨하지만 변화무쌍한 가능성이 있는 그런 무리, 상태를 만들고 싶었다. 뭔가 변화를 꾀(했던)하는 사람들이 지금 그런 상태에 있는 것 같다. 허리케인은 방향과 속도를 예측할 수 없고, 그 안에 우박을 갖고 있는지, 비를 갖고 있는지, 바람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돌아다니는 거라 본다. 어떤 모호함을 포함하면서 아직 답보 상태에 있지만 파급력을 가지는 존재였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제목에 담았다.
해주: ‘Relaxed’ 라는 단어는 ‘아직’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앞으로 점점 세어 지거나 커질 허리케인.
한나: 어쩌면 그러다 그냥 사라질 수도 있다.
해주: 작업의 형태에서 지난 번 <스윙잉>과는 다르게 회전하는 대열도 만들고, 음악도 새로운 버전으로 사용한다고 들었다. 특히 천정에 회전 형태의 설치를 생각한 것은 어떤 필요였을까? 파급력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장치가 될까?
한나: 이전 <스윙잉> 작품들의 자세는 스스로 직립하는 것이었다. 그런 단순하고, 센 잣대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풀어주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 스스로 서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사람이 스스로 서는 것도 힘들고 물체가, 기능성이 없는 예술 작품이 선다는 것 자체, 입상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 조건을 풀어주기 시작하면 작업의 형태가 더 자유로워지고 조금 더 책임감 없는 모양을 해도 되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해주: 책임감 없는 모양?
한나: 서 있지 않아도 되기에 어떤 모양도 괜찮다는 것. 매달리기도 하고, 중력을 타지 않는 방식으로 설치된다는 것. 여기에 ‘책임감’이라는 말을 꼭 쓰고 싶은 것은, 직립이 물리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독립’의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멋대로 무슨 포즈를 취해도 되는 것이니까, 공중에서는 수직보다 평행으로 서기도 한다.
해주: 지난 <스윙잉> 전시 전체 구성의 어느 정도가 이번 작업에 다시 사용되나?
한: 50-60퍼센트 정도. 온전하게 그 모양인 것은 40, 일부가 부서졌기 때문에 부서진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10-20, 그 외에는 새로 만드는 것들이다.
해주: 보통 작업은 전시의 시점에서 고정된 형태를 가지게 되고, 그 전시의 맥락과 공간에 맞춰 설치를 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소개될 때 그 형태를 대체로 유지하는 편이다. 물론 이 작업은 구성 요소가 많은 설치이기는 하지만 재현되지 않고, 현재 시점에 맞게 소환하여 새로운 버전으로 만든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업에 대한 특별한 입장이 있기 때문인 것인가.
한나: ‘시위대는 시대상을 반영해야 한다.’ 그런 포맷의 작업이었다. 그래서 다른 작업에서의 재현과는 다른 것 같다. 그 순간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시위대로 소개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던 것 같다.
해주: 그렇다면 앞으로 다른 모습으로 다른 입장으로 계속 변형해 갈 수 있을텐데, 과거의 다른 작업들의 경우에도 이렇게 소환된 적이 있는지?
한나: 아직 없었다. 동물권에 대한 작업을 하고 다른 전시에서 다시 소개했던 경우는 있는데, 메세지가 고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형태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스윙잉>은 출발부터 세상의 오합지졸, 여러 사람들의 의견, 생각, 변화의 욕망을 넣고 싶어서 소환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해주: <스윙잉>은 한 방향으로 걷는 역동적인 시위대로 변화를 굳게 믿는 모습이었다. 이번 작업내부 구성 속에도 구체적인 메세지가 있는지?
한나: 구체적인 말을 못하고 있다. 그 때는 각 작업에 민감하게 구체적인 요소를 넣었는데, 이번에는 구체적이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열도 변화하게 된 것이다. 구체적인 무언가를 주장하는 인물이 많지 않다는 것은 이 작업의 아쉬움이기도 하고 특징이기도 하다. 특정한 무엇이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그런 주장조차 주저하게 되는 상태인 것 같다. 그것이 답답하지만, 그러한 나의 상태가 이 작업에 들어간다. 뭔가를 주장하는데 주저하게 되는 이 상태를 가리지 않고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해주: 답보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지만, 재료의 사용에는 변화가 있다. 재료와 형식을 바꾸는 것은 중요한 변화이다.
한나: 전시가 끝나고 나면 다시 쓰일 수 없는 작업의 연약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작업이 유지되고 보수가 가능하게 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생각하면서 타벤더를 사용하여 주름이 그대로 얼은 것 처럼 고정되게 하거나, 반 세라믹 정도의 강도를 갖는 점토 등 좀 더 유지 보수 능력이 있는 것들을 실험해 보게 되었다. 한편, 기존의 <스윙잉>의 작업들을 꺼내어보니, 색깔 점토처럼 유지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오히려 잘 남아 있는 경우들이 있었다. 공들여 만든 것들은 삭고, 의외로 잘 남겨진 것들이 있는데 그러한 재료들을 강화해서 쓰게 될 것 같다.
해주: 작업의 보존에 대한 고민들과 함께, 이 시리즈는 작업의 맥락은 기존의 변형이지만, 재료에 있어서는 고정성을 강화하고 있다.
한나: 보존 그리고 보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보존을 생각하면 다음 작업으로 나아가기 어렵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시리즈가 계속된다면 시즌 1의 작품의 최소 1-5개는 끝까지 갔으면 좋겠다.
해주: 물질 자체가 쉽게 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렇게 많이 사라질 것 같은지? 한나: 과연 유지할 가치가 있나를 생각하다 보면 앞으로 계속 갖고 있게 될지 의문인 것도 있다.
해주: 이 작업은 작가와 함께 늙어가는 작업인 것인데 시간의 축으로 보자면, 매우 스케일이 큰 작업인 셈이다.
한나: 정치적 스탠스로 봤을 때 작가는 진보, 그 보다 더 앞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야만 존재하는 거라고 늘 생각하고 배워 오기도 했다. 인간 우한나로서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할 때도 그 생각을 유지하고 픈 마음을 이 작업에 투영하는 것이다. <스윙잉>은 변화를 바라는 시위대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광장에 나가서 정권 퇴진을 바라던 나의 몸이 있었던, 그 처음 버전에 쏟아낸 후, 그렇게 바뀐 정권에서 그다지 만족할 만한 변화가 없었던 것, 나 자신도 그 때와는 다른 생활인이 되었다는 변화가 이 작업에 들어 있다. 일종의 회의감도 있지만 그것에 마냥 휩 쓸리고 쉽지만은 않은 그런 상태, 그 스모그 상태를 허리케인으로 드러낸다.
해주: 작업에 천을 많이 사용하는데, 천을 사용하는 여러가지 방식을 실험해보고 있다고 들었다.
한나: 천 하면 바느질을 생각하기 쉬운데, 바느질도 촘촘하게 하거나 실오라기가 풀리도록 느슨하게 하는 등 다양한 방식들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또한 끈끈한 군집이 되는 것으로서 직조도 있고 매듭도 있다. 그것을 하나의 사회적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직조는 결이 같아야 하는데 매듭은 결이 같지 않아도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서 절대 풀리지 않게 된다. 그런 부분들이 쾌감을 준다. 여러 방법들 중 매듭을 가장 좋아하고, 꽉 묶인 것 아래로 떨어지는 드레이프를 좋아한다. 그것이 늘 하나의 개인보다 오합지졸의 다수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 작법에 맞아 떨어진다. 넥타이도 남성적 상징 때문이 아니라 패턴이 다양해서 좋아한다. 원래 매듭과 드레이프 요소가 있는 그 사물이 서로 다른 천과 묶였을 때가 흥미롭다.
해주: 선택하는 천의 재질, 색깔들도 일부 상징을 담는지? 혹은 그림, 드로잉을 하듯이 선택하는지? 자주 쓰는 물감처럼 주로 선택하는 천의 색감이 있는 것 같다.
하나: 드로잉처럼 선택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마 소재는 갑자기 뉘앙스가 달라지는 것 같아 쓰지 않는다. 그 보다는 광택이 있는 천을 좋아한다. 컬러 팔레트가 하늘색을 기준으로 하여 연둣빛 하늘, 핑크빛 하늘 등의 계열로 가고, 그것과 어울릴만한 색감들로 구성된다. 여기서 의외성을 가미할 수 있는 주황색이 선택되는 등의 방식이다. 가끔 검정으로만 구성된 멋들어진 작업을 꿈에 선 가 보고 연구 해보지만 결국 거기에 파란 리본이 하나 달리는, 그런 식이다.
해주: 예전에 앨리스 캐릭터를 다양한 형태와 색으로 변형하는 드로잉 연습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한나: 늘 그러한 그림, 드로잉 연습을 하고 그 연습의 결과가 본 작업의 컬러에 많이 반영된다. 그런데 올해는 물성과 형태에 대한 연습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해주: 고정성이 있는 재료를 사용하게 되면서 형태의 결정에 더욱 신중하거나 ‘이미 나와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며 인정해 버리거나 이런 재료를 대하는 마음이랄까, 작가와 재료 사이의 에너지의 교환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한나: 아직은 그 교환에서 이기지 못한 상태인데 그래도 좀 어떻게 싸우면 될거 같다. (웃음) 좋은 것을 봐도 모방을 잘 못하는 것이 나의 장점이기도 한데, 새로운 것, 새로운 재료를 대하다 지면서 생긴 이상한 어떤 방법이 나의 방식이 되지 않을까.
해주: 그게 또 나이가 들면서 점점 달라지고.
한나: 아무도 나를 규정할 수 없어.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