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추성아 (독립큐레이터)
반짝거리는 조명들 사이에 고색창연한 움직임들이 기억 속에 아른아른하다. 발 아래로 쾌쾌한 카펫 냄새가 나는 듯한 칼라일, 리츠에서 들릴 법한 축 늘어지는 여성 보컬의 목소리보다 카메라의 요란한 셔터음들이 빅터앤롤프(Viktor & Rolf)의 2017년 봄/여름 오뜨 꾸뛰르가 열렸던 런웨이를 가득 메웠다. 빅터앤롤프를 대표하는 소재인 폴리우레탄의 비비드한 망사 원단과 패치워크 조각보로 꼴라주 된 드레스는 브랜드의 시그니처인 과장된 러플과 정교한 디테일의 전위적인 조각이다. 완급 조절이 어느 정도 되는 기성복 컬렉션과 다르게 오뜨 꾸뛰르는, 현기증 날 정도로 패션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하게 연극적이고 과시적인 무대의 장치로 극대화된다. 당시 런웨이의 중앙에 놓였던 프랭크 브뤼게만(Frank Bruggeman)의 거대한 커미션 꽃 조각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독자적인 회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던 후기 르네상스 꽃 정물화에서 확장되어 또 하나의 꿈 같은 현실로 튀어나왔다. 얀 브뤼헐 1세(Jan Brueghel I)의 회화에서처럼 가장 보기 좋은 상태의 꽃들, 비율과 상관없이 위로 커지는 꽃들은 마치 모델들의 상체 위로 올라갈수록 퍼지는 낭만적인 러플과 같이 부를 과시했던 호사스러운 수집 대상의 절정을 보여준다. 제 철이 지났음에도 가장 아름다웠던 찰나의 순간을 박제하려는 꽃 조각은 한 시즌이면 빠르게 소비되고 잊혀지는 패션 인더스트리의 런웨이 중앙에 하나의 조각으로 우뚝 서 있는 풍경이 냉소적으로 보일 정도다.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는 꽃을 헛된 삶인 바니타스(Vanitas)적인 보스카르트(Ambrosius Bosschaert I)의 정물화처럼 세속적인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채울 수 없는 현실과 맞닿아 솔직함과 거짓말, 그 회색의 어느 지점에서 양가적이고 일그러진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시지프스(Sisyphus)의 돌을 굴리며 소박한 꿈을 가장 깊숙한 마음 한 켠에 품는다. [물라쥬 멜랑콜리크 : +Viktor & Rolf 2017s/s, 2019]
제우스가 헤르메스를 통해 시지프스에게 지하세계의 산기슭에 거대한 바위를 굴리게끔 내린 굴레의 형벌은 삶에서 잔인하게 다시 찾아오는 고통, 부조리와 상실감과 같아 각자의 또 다른 방어기제를 쌓게끔 만든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합리화나 순화, 자기 부정 혹은 사소한 속임수 같은 보호막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욕망하는 세상을 정직하게 대면하기에 너무나 잔혹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질 수 없는 물질적인 소유욕과 설령 작금의 노력으로 소비하게 될지언정, 착 감기는 공간이 현실적으로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 둘에서 오는 괴리감은 유리같은 순진한 마음을 다시 한번 휘저어 절망에 빠뜨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지프스가 돌을 정상에 올린 순간, 그 돌이 다시 굴러 떨어졌을 때 “어쩌면 기분이 좋았을 것”이라는 상상은, 그 순간에도 즐길 수 밖에 없는 희극과 비극 사이를 오가는 울고 싶은 인생살이일 것이다. 결국에 신화는 어떤 대상에 대한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허구와 현실에 대한 오작동을 일으킨다. 그것은 한 때 캄캄한 도시의 “촉촉투명각”에서 바라본 바깥 세상에 대한 겉잡을 수 없는 시선이었다면, 지금은 어쩌면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미래를 향한 자신의 복제들을 사이키델릭하게 재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물주의 손으로 거칠게 꿰맨 파스텔 톤의 패브릭 덩어리는 아크네 무스비(Acne Studio Musubi) 쇼퍼백으로,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5ac 미니백으로,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의 드레이프 장식으로, 무심하게 손으로 들었을 때 가장 멋진 형태 혹은 순간적인 조각 오브제의 구현인지, 누군가의 것과 당신이 만든 것에 대한 미감으로 탄생한다. [Bag with You, 2019] 비오는 날의 슬픔의 공간에 놓인 당신의 아끼는 소품들은 루이스 폴센(Louis Poulsen)의 PH5 모조품과 함께 쑥스러운 트로피들과 같이 숨어서 얼굴을 드러낸다. [Saturanus and Uranos, 2019] 그렇게 진짜배기와 위대한 복제품은 교묘하게 21세기 루이스 폴센의 역사와 함께 간다. 비오는 날의 슬픔은 단단한 방패와 갑옷으로 덮고 요새를 세운 우리의 비밀스러운 욕망이 구축된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y)”일 것이다. 이 기이한 방에는 모든 것이 박제되어 있어 아름다운 것들을 추모하는 죽음에 해당하며 그래서인지 현실 영역을 담고 있는 슬픔은 반대편의 비오는 날의 기쁨과 가깝고도 먼 곳에 듀플렉스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저울질 할 수 있는 좌표에 위치해 있다. 이 작은 세상의 좌표에 시간과 공간이 서로 딱 들어맞는 완벽한 지점이 있다고 믿는 당신의 물라쥬 멜랑콜리크, 이것이 “시티유닛”의 반대편이 아닐까 싶다. [비오는 날의 슬픔, 비오는 날의 기쁨, 2019]
가위로 오려낸 벽과 카펫을 라카 스프레이로 박음질한 리버서블한 공간은 로코코 시대에 유행했던 달달한 덩어리의 마카롱과 같은 색으로 뒤덮여 있다. 블루 미스트로 도색된 흘러내리는 듯한 몰딩된 벽면의 듀플렉스는 유년기 집이라고 하는 노스탤지어의 장소이자, 정지된 연극의 무대이자 제의적인 의식을 치르기 위해 홀연히 재가 될 욕망 덩어리들이다. [duplex, 2019] 이 욕망은 바로크, 로코코 시대와 신고전주의의 순백의 엠파이어 라인을 넘어, 시대의 오마주이자 모방을 가감없이 보여준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앙글로매니아 컬렉션(Anglomania Collection)의 타탄(Tartan)체크와 장폴 고티에(Jean-Paul Gaultier)의 뷔스티에(Bustier) 랩 드레스의 해체된 모습으로 컬트 패션이 공간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물라쥬 멜랑콜리크 : Vivienne Westwood check + Jean Paul Gaultier’s bustier, 2019] 바쿠스의 거대한 포도송이 모빌은 오만한 시점에서 가질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장식으로 현실과의 괴리를 우스꽝스럽게 드러낸다. [Bacchus, 2019] 프리미엄이 천정부지하게 붙는 오늘의 스니커테크에 해당되는 나이키 덩크[Me Nike Like, 2019]는 조악한 종아리 오브제가 장착되어 이것이 진품인지 모조인지, 진품에 대한 오마주인지 중요하지 않은 듯 그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한 발로 아슬아슬하게.
지루함을 느낄 겨를 없이 넘치는 욕망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고립된 방은 무엇일까? 마치 지휘자가 관객으로 하여금 음색을 구분할 수 있도록 유도하여 미세한 음색을 마스킹하지 않은 것처럼, 새삼스러운 오마주와 모조들은 지휘자 시점에서 바라본 150호 회화[View Point of Conductor, 2019]의 탄력적인 저역에서 시작하여 충분한 타격감의 벽화[Stroke Performance, 2019]까지 음의 입자를 다채롭게 반죽하여 펼쳐놓은 듯 가지런하다. 바늘과 실로 곱게 엮은 이 음의 입자들은 숨어 있는 예쁜 바니타스의 정물[Bonita Vanité, 2019]과 커튼 뒤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작은 포도 한 알과 상반되게 소유와 통제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실천한다. 무엇이든 엮을 수 있는 이 방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죽음에 대한 희망을 맹목적으로 기다리고 기대하는 오늘의 사소한 욕망들이 만들어낸 꿈과 기억 그리고 두려움이다. 우리는 이 욕망들에 다다르기 위해 “죽기엔 너무 이르고, 살기엔 너무 타락했다(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
[*] “SEX: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는 1970년대에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과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운영했던 매장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