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촉촉한 날 유려한 곡선이 가득한 물라쥬 멜랑콜리크의 내면은 감정의 끝자락에 놓인 것과 같다. 이곳은 무수한 꿈속에서 겪었던 사건들이 한낱 기억으로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 놓아두고 싶었던, 한 사람의 여러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는 장소이다. 물라쥬 멜랑콜리크를 살아 숨 쉬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쏟았던 한 사람, 작가 우한나와 이의 뮤즈인 물라쥬 멜랑콜리크는 2019년 한 해 동안 함께했다.
우리는 물라쥬 멜랑콜리크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게 된다. 안녕? 햇볕은 사라지고 점차 어두워지면서 여려 겹의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빗소리와 함께 여러 스푼 수분 추가된 공기. 순간 물을 꿀꺽 꿀꺽 소리 내어 마시던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꿀꺽’ 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다음이 없을 것 같아.” 물라쥬 멜랑콜리크의 마음속 공간으로 들어가면 눈앞에 놓인 벽들로 인해 시야가 막히게 되는데 빗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이곳은 오래전부터 항상 비가 오고 있었을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눈앞에 서있는 나무 벽 너머로 곧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궁금하지만 그전에 먼저 확인하고픈 공간이 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좁은 통로. 공간을 보고 느끼며 깊이 소통하는 사람인 우한나 작가는 항상 눈의 시선을 멀리 둔다.
단호하지만 다정한 눈동자는 벽을 쓰다듬고 공간의 부피를 읽는다. 공기와 이름이 바뀌는 순간, 작가는 항상 얘기한다. “나 되게 즐거운 생각이 떠올랐어.” 순간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전시장 벽에 기대어 서있는 커다란 회화 작품을 감상하게 되는데 좁은 복도에서는 가시거리가 나오지 않으므로 상당히 가까이서 얼굴을 맞닿아 바라보게 된다. 물감, 붓질과 함께 캔버스 표면에 앉은 작가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캔버스의 존재적 물질성에 집중을 하여 ‘결국 이것은 캔버스라는 재료에 그려진 회화’이며 특정한 대상에게 주는 선물로서 묶음 장식을 첨가했다. 매일 누군가의 머리를 땋는 작가의 손목은 닳고 닳아 얇고 가늘어졌다. 꽈배기처럼 묶은 천 리본 장식들은 작가의 손목 대신 전시장 곳곳에 놓여있으면서 힘의 간극을 조절하는 주체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올해 8월, 작가는 작업실 벽 크기만 한 캔버스를 바라보며 설레했다. 색이 담긴 페인트 통을 가지고 와서 음악의 비트에 맞춰 춤을 추며 붓을 들었다. [1.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는 귀여운 한나 사진] 하얗고 큰 캔버스 앞에서는 심리적 부담감에 움츠러들 법도 한데 작가는 백색의 캔버스를 순수한 대상처럼 친근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지켜본 우한나 작가는 본연의 심미적 감각을 캔버스에 입히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자연스러운 의식의 거행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며 이로써 완성된 <지휘자 시점>은 오케스트라의 시선을 역(逆)으로 바라보는 리더의 눈이자 회화를 대하는 작가의 작가적 태도가 담긴 작품이다. [<지휘자 시점> 작업 디테일이나 전시 전경] <지휘자 시점>뿐만 아니라 벽을 세워 만든 공간 <듀플렉스>는 작가가 조물주로서 공기를 나누고 과거의 시간을 소환하여 입체적으로 구성했다. 빗소리가 들리는 전시장의 내부로 걸어서 들어가면 물라쥬 멜랑콜리크의 심장이기도 한 이 장소는 작가의 어린 시절을 환기한다. [<듀플렉스>작업 전시 전경] 어느 날 우한나 작가는 작업실의 벽 일부를 레몬색, 파우더블루 색으로 입혔다. 색을 칠하고 분위기를 바꾸는데 거침이 없는 하얗고 긴 손가락들은 가냘프면서도 확신이 있었다. 작가 어머니의 팔레트를 옮겨온 듯 어린 우한나 작가가 자연스럽게 체화한 신비로운 색깔들. [2.작가의 어머니가 실제로 사용하던 물감과 미술 재료] 이는 항상 작가의 몸을 휘감고 손끝에서 반짝반짝 마법을 부린다. <듀플렉스>공간의 입구에 위치한 <물라쥬 멜랑콜리크>는 작가가 이미 오뜨 꾸뛰르 드레스로부터 영감을 받아 손수 제작하였다고 소개한 바 있다. [<물라쥬 멜랑콜리크> 드레스 사진]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의 지극히 핸드메이드적인,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술 작품의 프라이빗 함과 소비적 욕망을 한 땀 한 땀의 시간으로 대체하고 무수한 주름들 속 깊은 곳에 담았다. 반짝이는 화려함과 오직 물라쥬 멜랑콜리크의 내부에서 우한나 작가의 작품이란 이름으로 존재 가능한 광적인 무대는 과정과 완결의 사이에서 유영하며 한 달간 낭만을 쫓았다. 작가의 몸과 마음을 넣어 만든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 물라쥬 멜랑콜리크는 작품성 그뿐만 아니라 작가의 작가적 태도와 현대 사회의 여성으로서의 고민이 진솔하게 드러나는 전시였다. 달콤한 포도송이에서 떨어져 나간 낱낱의 알맹이들은 이리저리 뒹굴고 강한 빛으로 생긴 자신들의 그림자를 지킨다. 그리고 ‘아름답고 안락한 이 공간에서 벽걸이 시계의 실질적인 역할 따위는 잠시 잊어도 돼.’라고 속삭이는 듯 빗소리는 한없이 우리를 슬픔의 환희 속으로 내몬다. 매번 쉬어갈 틈 없이 바로 다음의 차가운 스텝을 향하는 우리들에게 낭만의 순간이 담긴 보따리를 내민 작가는 오늘도 꽃병 속의 물을 체크했다. 모든 생명력은 순간적이며 깨져버린 접시의 조각처럼 되돌릴 수 없기에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집중한다. 물라쥬 멜랑콜리크라는 뮤즈를 탄생시키고 지켜온 한 달이라는 시간은 이제 빗물로 촉촉이 마음에 자리한다.
한나는 매일 밤 자신에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자정 12시부터 시작되는 시끌시끌한 명상은 온전히 한나와 한나의 놀이이며 이 세상을 영유하기 위한 버팀목이다.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기도 하고 작업실에서 끝내지 못한 바느질을 하면서 오늘을 복습하고 과거와 미래를 뛰어다닌다. 한나는 이제 곧 다시 만나게 될 뮤즈를 위하여 오늘도 깊은 잠을 청하고 밤새 아름다운 꿈을 만든다.[(제안) 3.한나의 자고 있는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