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nah Woo




작가노트


그것은 얇고 가벼우며 무한정 넓어질 수 있고 또 높은 곳에 달아 늘어뜨릴 수 있다. 길다랗게 뽑아내서 서로를 매듭지어 잇고, 넓게 펼쳐 다차원의 공간으로 나누며, 끝과 시작의 시접을 이어 ‘내부’라는 공간을 형성하고 그 안에 숨이든, 솜이든 무엇인가 채워 여밀 수 있다.


부드럽게 잡히는 주름과 광택이 있는 천은 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작업 과정에서 ‘가위, 실, 바늘’이 오가며 생기는 흔적은 늘 가능성의 영역이다.


나는 세상은 망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낙관주의자이다. 그리고 개인의 의지가 결국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주인공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를 디오니소스들의 고군분투 현장으로 바라보며 힘을 얻는다. 나의 작업은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기록이며 다시 나타날 주인공을 위한 무대다.


2019년 3월


서사와 비극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작업으로 표현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매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별적으로 작품 하나가 주는 의미보다, 그것들이 모여 전시라는 ‘사건’을 만들어 메세지를 전달하는 편이다.


입체조각을 중심으로 간단한 영상이나 드로잉을 함께 생산한다. 패브릭과 솜을 이용한 바느질, 그의 반대성향
의 스틸소재의 입체를 제작하여, 서로 동등한 비중으로 엮는 것에 흥미가 있다. 작은 덩어리와 큰 덩어리의 물
질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때로는 부속품이자 장식, 또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연출해내는 방법에 대해 고
민하며 최종적인 설치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에 집중한다.


‘군중의 익명성’과 ‘비극 속 주인공’은 절대로 반댓말이 될 수 없음은 나의 도시 속 삶을 견디게 하는 믿음이다.


2018년 2월


나는 궁극적으로 서사를 구성하는데 목표를 둔다. 그 서사 속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 되기도 하고, 아무도 본 적 없는 미지의 주인공의 지나간 흔적을 찾는 목격자들로 관객을 설정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곳에 도착한 관객이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내 작업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각각의 요소들은 인물, 사건, 배경으로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들어 간다. 그것은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조건이 되어, 작업이 시작되어야 할 이유, 진행 과정 안의 작은 선택들의 기준이 된다. 각자의 제자리는 대부분 딱 떨어지지 못하는 위치로 귀결되는 편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에 의해 자리 잡는다.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 나는 반대이며 극을 이루는 관계들을 동시에 두는 것은 항상 집중하며 관찰한다. 그것들은 아무리 동시에 두어도 중화되지 않고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동등하게 발현한다. 그것이 나에게 이상적인 장면이다.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나의 작업은 무대로 나타나며, 주인공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서사가 전해지는 것과 같다.


2017년 10월




눈視들이 떠다닌다. 내가 매일 보는 무수한 눈目들은 표정을 만들고 그것으로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다. 빈틈없는 시선들이 도시에 모여 익명의 군중을 이루고 있다. ‘내 눈을 통해 보는 그들의 눈’. 그것은 일상과 관계를 응집해 놓은 기본적인 하나의 ‘단위’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단위에 집중해서 도시를 관찰한다. 다른 곳보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거대한 인공물 속에 살며 인공물에 실려 우르르 이동하는 곳. 사람들은 그 안에서 몸이 부딪힌다. 몸도 부딪히고 눈빛도 부딪힌다. 길면 3초, 그 이상이 지나면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무심한 관찰, 의도하지 않은 눈맞춤, 무의식적인 방어, 적개심, 간혹 호의가 오간다. 일방적으로 나 이외의 모든 것을 대상화하는 동시에, 또한 시선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인지했을 때 개인은 ‘도시’라는 공간 속 자기 위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시선을 숨기는 일에 익숙해지면서 어느새 도시인으로 적합해졌다고 느꼈었다.


일단 눈들을 만들어야 했다. 내가 오브제를 만들면 그 오브제가 놓인 곳에 따라, 눈동자를 그리면 그 눈이 향한 곳을 따라, 눈은 즉시 시선이 생긴다. 나는 그것들이 모여 있을 때 ‘관계’가 생기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 관계들의 수가 많아 질수록 설치 방법이 명확해졌다. 오브제와 영상을 이 공간에 설치하며 각각의 간략한 관계를 만들었다. 시선 속의 무언의 인상들, 예를 들면 호소, 요청, 거부 등의 메시지를 포착했고, 오브제 사이의 거리, 방향, 위태롭거나, 더럽거나, 너무 먼 위치에 놓음으로써 그것들의 성격을 정해 나갔다. 보이지 않던 시선을 느끼는 것,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것, 디지털 매체로 중계되기도 하고, 허공을 향하기도 하는 ‘시선’자체가 또다시 시선의 대상이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것들이 모여 아무런 말도 없이 생겨버리는 일시적 관계를 드러내고 싶었다.


‘촉촉투명각’은 내가 동료와 작업실로 사용하는 곳이다. 올 초부터 매일 이곳을 오가며 보던 서울은 내가 그동안 단편적으로 느꼈던 도시의 인상을 규격화할 수 있게 했다. 뜨겁게 돌아가던 모터들이 멈추고,다들 집으로 돌아간 을지로의 밤. 반짝거리는 도시의 뒷모습같은 이 공간은 내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내기 적합했다. 낮에는 인쇄공장들의 바쁜 노동의 현장이며,밤이 되면 고요하고 캄캄한 이곳은 빈 공간이 된다. 여기에 관념으로 존재했던 시선과 그 관계의 단위들이 각자의 모습을 하고 서 있다. 이 작업물들이 도착한 관객에게 그동안의 도시 속 시선 여정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희망한다.

2016년 9월




도시생활의 우울함과 무력함은 내 작업 전반적 주제이다. 표현방법은 영상, 오브제와 공간연출이며, 빛과 소리를 첨가하여 다양한 매체를 섞는다. 대부분 퍼포먼스적 요소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작가와 관객, 때로는 오브제 자체가 퍼포먼스의 주체가 된다. 그것은 영상으로 기록되어 보여지며 상영 방법에 의해 완결된다.

부드럽고 가벼운 천의 특징과 그것을 투과하는 빛, 그리고 천 내부를 솜으로 채워 덩어리를 만드는 것은 나의 세부적 표현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며 이러한 표현방식과 더불어 버려진 물건, 손으로 빚은 조각들이 변주되며 익숙한 듯 어색한 모습을 만든다.

2016년 3월


상태의 표면보단 그 표면의 내부를 유추하며 시작된다. 이러한 관찰 방식은 ‘결국 모든 일에는 다 일정한 법칙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그래서 나에게 이분법은 너무나 강력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면 현실과 환상, 기쁨과 절망, 자살과 삶, 인공과 자연 등의 두 개로 나뉘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고, 빈틈없이 똘똘 뭉친 한 덩어리가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 몸이지만 분열적인 상태이거나, 그 상태를 그대로 평면으로 눌러버린 모습을 만들고 싶어한다. 태양계의 행성들처럼 각기 다른 속도와 원주로 움직여도 결국 중심은 같기 때문에, 시작과 완결을 잇는 순환구조의 매듭을 단단히 묶기도 하고, 어떨 땐 무책임하게 다 풀어헤쳐 놓고 손을 떼 버린다.

2015년 8월







전시리뷰


시선과 눈빛


낮의 을지로는 기계 소리가 리듬을 만들며 바쁘게 돌아가지만 밤이면 사람의 움직임은 잦아지고 소음은 조용히 가라앉는다.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무렵 촉촉투명각의 불은 밝아진다. 촉촉투명각은 을지로 한 가운데에 있는 작가 우한나의 작업실이자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린 공간의 이름이다. 인쇄소가 있는 1층을 돌아 복잡한 구조의 벽돌 건물 어딘가의 입구를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촉촉투명각이 나온다. 다시 찾아간데도 쉽게 입구를 알아내지 못할 것 같은 을지로 좁은 골목 사이라 길을 안내할 토끼라도 필요할 것 같다. 전시가 시작되는 실내 공간은 평범한 흰색 벽을 하고 있지만, 작품들은 문 뒤로 나 있는 옥상으로 이어진다. 마치 배의 갑판 마냥 앞으로 길쭉하게 뻗어나온 테라스이자 옥상인데, 안경처럼 동그란 물체가 도깨비불이 돌아가듯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있고, 양쪽 눈에서 빛이 나오는 소녀의 두상 조각이 도시를 등대처럼 바라보고 있다. 옥상의 담벼락에 기대고 몸을 길게 뻗으면 눈 아래 인근 건물들의 지붕이 펼쳐지고, 멀리 고층건물의 윤곽선들도 보인다.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시야가 뻗어가는 곳곳에 작업들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녁 7시부터 밤 11시까지만 문을 여는 이 전시는 어두운 바깥에 숨어 있는 작업들을 볼 수 있도록 손전등을 마련해 두었다. 천천히 탐색을 시작하면 주변 건물들의 옥상과 벽에 설치한 작업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동그란 불빛의 윤곽 안에서 형체를 찾는 일은 마치 동굴벽을 훑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암석들 사이를 긁고 드러낸 벽화를 찾아내듯이 깃발처럼 흔들리는 사람이나 얼굴 모양의 얇은 비닐들과 날아가지 않게 모래주머니로 괴어 놓은 형상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이 같은 형체들은 마치 어깨에 붙어 따라다니는 배후령이나 유령의 물질을 인화하여 드러난 것 처럼 도시의 표면에 생경하게 겹쳐져 있거나 간신히 붙어 흩날리고 있다.



이 전시에는 크게 두 가지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먼저 앞서 임의로 ‘형체’라고 부른 것들로, 눈의 자리에 구멍이 뚫려 있고, 팔 다리의 사지는 겨우 만들어져 있거나 혹은 얼굴만 남아 있는 것들이다. 실내공간, 옥상과 그 주변 곳곳에 놓인 이 형체들은 그 기본적 형태가 너무나 단순해서 서로 더 유사해 보인다. 동일한 캐릭터의 반복이거나 최소한 동족들의 집합같다. 눈동자가 없는 이들에게서는 특별히 어떤 감정을 읽을 수도 없고 몸체는 너무 얇거나, 혹은 스티로폼으로 대충 깎아 놓은 것이라 위험도,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전시에서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은 모두 앨리스이다. 야외에 놓인 두상 조각의 앨리스의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눈동자 대신 전구를 끼워 넣은 이 소녀에게서도 감정과 표정은 읽히지 않는다. 전시장 내부에는 고풍스런 받침대 위에 놓인 세 소녀의 두상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데, 이들 역시 얼굴 모습, 얼굴 색과 모양이 모두 다른 앨리스이다. 긴 머리카락만이 앨리스임을 알아보게 할 뿐 각기 모두 다른 디테일을 갖고 있다. 작가는 이 앨리스를 드로잉으로 수 없이 그려 하나의 책으로 묶어내기도 했는데, 어느 페이지의 앨리스도 똑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았다. 가장 익숙한 도상으로 알려진 파란 리본과 파란 원피스, 하얀 앞치마의 노란 머리의 소녀가 아니라 그저 ‘앨리스’라는 하나의 이름만 남고 수없이 많은 모습과 성격을 부여 받는다. 이 전시의 두 캐릭터는 텅 빈 기호처럼 존재한다. 작가는 작업마다 이 캐릭터들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거나 아예 성격을 제거해 버린다. 텅 빈 기호로서의 캐릭터들은 수많은 변주의 가능성을 갖게 된다.



작업에 등장하는 형체들에서 눈의 자리를 종종 도려내건 것은 오히려 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실내에 설치된 작업 중 하나인 <환상결론>에서는 눈알이 캐릭터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 눈이 바라보는 상들이 실에 매달린 형체들로 늘어서 있다. 특정 시간 안에 포착되어 흘러가는 이미지들이 여기서는 마치 모빌에 매달린 것처럼 색색의 선과 깃털, 크고 작은 형상들로 축적되어 있다. 마치 동공이 받아들인 이미지가 망막에 맺히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각 원리의 분석과 같이 피부와 눈, 그리고 이미지가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 실내 공간의 눈이 바라보는 이미지들은 관객이 옥상에서 바라보는 바깥의 풍경과 겹쳐진다. 외부에서 경험하게 될 도시 풍경과 시선의 관계가 여기서 모형으로 축소되어 있는 것이다. 실내 공간의 설치, 옥상 위의 설치, 그리고 건물 밖의 설치, 이렇게 세 개의 단락, 세 개의 확장하는 파동의 모습을 갖추면서 전시는 다양한 보기의 관계들을 예시한다. 빛의 조절은 보기의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실내의 빛, 야외의 어둠, 도시가 내뿜는 빛, 음영을 비추는 손전등과 같이 여러 단계의 빛의 맥락들이 등장한다. 바라보는 위치 역시 변주되고 있다. 작품이 놓여진 세 개의 공간이라는 설정 외에도 접근하거나 발견하기 쉽지 않은 창문 밖에 작품을 놓아두거나 시야의 아주 먼 곳까지 형체들을 배치하여 보는 거리와 위치의 다양한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모니터는 거울을 마주보고, 캐릭터는 화면을 마주보는 등 시선의 교차와 반사도 빈번하다. 연약하고 거친 재료로 만들어진 이 조형들이 텅 빈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비해 조금 더 구체적인 서사를 보여주는 것은 설치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영상들이다. 특히 전철역의 플랫폼 기둥에서 반복하여 발길질을 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에서는 답답함이나 무력한 분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전시 <시티 유니츠>의 작업들은 서울 한복판의 풍경과 겹쳐져지면서 도시 생활의 우울과 무력을 내비치지만, 동시에 이를 짐짓 대수롭지 않게 분해하고 있다. 눈의 자리가 뚫린 형체들을 바라보는 대신, 둥글게 뚫린 눈으로 보기를 상상해 본다. 너무나 시각 정보가 많은 도시의 중심부에서 일부러 눈의 초점을 흐려버리거나 마주하기 어색한 시선을 피하는 상황을 생각한다. 손전등 불빛이 비추는 도시의 옥상 위에는 바다의 잔물결이, 검게 둘러쳐진 빌딩 숲에는 동굴 속 잔상이 맺힐 수도 있다. 이렇게 나의 주관적인 보기의 방식을 바꾸면 적당히 소화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각 정보들만 남고 다른 것들은 조각이 날 수도 있고 추상으로 잔류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걸러버리고 나면 좀 숨을 쉴 수 있지 않을까?


김해주 독립큐레이터





빛나는 두 눈동자


우한나 작가의 개인전 《시티 유닛츠(CITY UNITS)》는 을지로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작가는 이곳을 ‘촉촉투명각’이라 부른다)에서 진행되었다. 원체 서울이라는 도시가 복작복작 하다지만 철공소, 공업사, 인쇄공장, 판촉물 전문 상가가 낮은 건물에 빠짐없이 들어서 있는 을지로는 서울에 또 다른 지형적 특성을 부여하는 곳이다. 을지로의 비좁은 골목을 거쳐 ‘촉촉투명각’으로 들어가는 건물의 1층까지, 밤낮 없이 돌아가는 윤전기의 규칙적인 소음이 골목 곳곳에 퍼진다. 정해진 위치에서 기계의 움직임을 쫓아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틈에서 ‘촉촉투명각’은 을지로와는 어울리지 않는 외딴 섬과 같은 공간이다. 태극빌딩 3층 복도 끝의 ‘촉촉투명각’으로 걸어들어가는 동안 바깥의 소음은 이상하리만치 멀어지고, 작가의 작업이 설치된 공간은 생경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으레 느낄 수 있는 낯섦과는 또 다른 ‘촉촉투명각’만의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는 19시부터 23시에만 개방하는 전시의 특성상 공간 곳곳에 가라앉아 있는 어두움에서부터 일정 정도 비롯된 것이었다.


전시장의 위치도 전시의 시간도 어긋나 있는 《시티 유닛츠》에서 작가가 소환해낸 형상은, 의미심장하게도 유령들이다. 유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조각 외에도, 높은 탁자 위에 닿을 듯 가까이 붙어 있는 세 개의 머리(〈관람모델 A to C〉)와 신체가 뒤틀린 채 의자에 앉아 있는 〈갈 곳 없는 여자〉 역시 경직된 육체의 모습으로 이미 죽어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 세계’에도 ‘저 세계’에도 모두 속하는 유령은, 결국은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로 시공간이 뒤틀린 ‘촉촉투명각’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생명 없는 유령에게 우한나 작가가 생생하게 부여하고 있는 기관은 바로 ‘눈’이다. 서로를, 때로는 모니터를, 혹은 허공을 향한 유령의 시선은 시선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를 암시한다.


시선에 대한 실험은 ‘촉촉투명각’의 실외공간에서 더 적극적으로 이뤄진다. 작가는 ‘촉촉투명각’ 주변의 건물과 또 그 건너편의 건물에까지 유령들을 설치했고, 이를 손전등으로 비추어 찾도록 유도했다. 말하자면 작가는 관람자에게 옥상에서 빛으로 도시를 탐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관람객은 작가의 작업을 찾는다는 명분하에 도시를 탐색할 수 있는 자율권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미 을지로의 골목이 어두워져 손전등 없이는 그 윤곽 정도만 구별이 갈 뿐이어서, 도시를 더듬는 손전등의 빛과 시선은 등치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는 안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티테이블 빔〉이 직접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관객은 ‘빛’이라는 매개를 통해 어두움을 뚫고 자신의 시선 자체가 가시화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실내의 유령이 여러 가지 버전의 시선을 보여줬던 것과는 다르게 실외에서는 하나의 시선에 대한 실험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등대가 된 것처럼 주변을 살피는 과정의 (빛으로 상징되는) 시선은 공격적이지도 않고, 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응시도 아니다. 빛의 시선을 탑재한 관객은 보는 주체가 되는 것, 사건을 ‘바라보는 이’로서의 자신을 경험한다. 어떤 목적의식이 분명한 시선, 발견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도록 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선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빠져나간 골목을 뒤적이는 시선은 도시-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시선이다. 대낮의 도시를 활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안 보이는 척, 안 본 척, 못 본 척, 보고도 못 본 척, 보이는데 안 보이는 척, 보고 있지만 안 보는 척 (해야)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시각적 자극에 일일이 반응할 수 없어 생겨난 생존 전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눈뜨고도 무엇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도시에서 《시티 유닛츠》의 경험은 시선이 본래 가지는 힘을 느끼도록 한다. 다만 작가의 설치물이 흩날리는 유령이라는 점이 영 마음에 걸린다. 을지로에 있을 법하지 않은 공간에서 점점 더 어두움을 더해가는 ‘촉촉투명각’에 출몰한 유령들에게 내가 홀린 것은 아닌가, 자꾸 손전등을 비쳐보게 된다.


옥다애 미술세계 기자





서울, 플랫폼, 그리고 손전등


작가 우한나는 작지만 스스로 구축한 플랫폼을 통해 첫 개인전을 선보였다. 지난 9월 20일에서 10월 4일까지 가 열린 촉촉투명각은 작가가 동료와 함께 사용하고 있는 작업실이다. 을지로3가역 8번 출구로 나와, 휴대폰을 이리저리 돌려 지도앱을 확인하면서 걸어야 겨우 찾아갈 수 있는, 잘 드러나지 않는 도심의 구석이다. 오후 7시부터 11시라는 관람시간에 맞춰 으슥한 을지로 골목길을 따라 이곳을 찾아가는 것은 마치 낯선 도시를 탐험하는 느낌이다. 작가는 ‘도시생활의 우울함과 무력감은 내 작업 전반적 주제’라고 말하고 자신은 서울에 사는 도시인으로서 시선을 숨기는 것에 익숙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오히려 시선을 숨기는 것을 극복하려는 듯 적극적으로 시선을 건네고 있다.


작가는 서울 시내에서 주워온 오브제와 갖가지 사물을 조합하고, 구멍을 뚫거나 그려서 눈(目)을 만든다. 그리고 이 눈을 통해 사물이 시선을 교환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손전등이라는 새로운 시선을 보탠다. 관객은 작업실에 들어서자마자 안내자로 부터 손전등을 받게 되는데, 손전등의 불빛은 시선의 움직임을 가시화하고, 어둠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곳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눈’이다. 관객은 손전등을 이러저리 비추어 보며 숨겨진 작품을 찾아보기도 하고, 어둠 속에 잘 보이지 않는 작품을 면밀하게 살펴보기도 한다. 작업실부터 시작된 전시 공간은 외부로 이어진 테라스와 건물의 외벽을 넘어, 건너편 건물의 지붕까지 이어지는데,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 손전등을 전시장 밖 골목길과 건물 등에 비추어 본다. 손전등은 작업실 안에서 밖으로, 사물에서 공간이라는 시선의 확장을 이끌어내며 서울이라는 익숙한 도시의 낯선 풍경들과 관계를 형성하게 한다.


작가가 에서 보여준 작품은 스티로폼, 비닐, 천, 털 등 보잘 것 없거나 연약한 성질의 오브제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관객이 손전등을 비추며 살펴보았던 어둡고 인적 없는 골목길은 대도시 서울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곳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잠깐의 시선조차 두지 않아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외면했을 법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우리가 속해 있는 삶의 일부분이다. 작가의 작업실로부터 시작된 이 전시는 내가 속해 있는 환경과 주변, 그리고 도시를 살펴볼 것을 권유하면서, 나아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손전등을 비추어 보는 것처럼 보다 면밀하게 관찰하기를 제안하고 있는 것 같다.


우한나가 작업실을 통해 스스로 플랫폼을 만들고 작업을 선보였던 구조는, 최근 몇 년 사이 젊은 미술가들 사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방식이다. 공간을 마련하여 동료를 초대하거나, 사적 공간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 이른바 ‘신생 공간’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플랫폼은 기존의 미술계 시스템에 대안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거대한 중심으로만 향해있던 권력을 자유롭게 분산시키고 또 다른 영향력을 키워내고 있는 듯하다. 서울 곳곳의 이 작은 플랫폼이야 말로 관객으로 하여금 가장 ‘적극적인’ 시선을 갖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의 젊은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유효한 방식으로 보인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거대한 플랫폼이 아닌, 겉으로 보기엔 작고 닫혀 있는 플랫폼 같지만, 우리의 주변과 그 요소를 줌인해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젊은 작가들은 스스로 만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작은 시도들을 적극적으로 보고, 시선을 교환하고 관계를 맺는 행위이며, 보지 않았거나 무심하게 보았던 것을 면밀하게 보게 하는 가능성일 것이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손전등을 비추어 보는 것처럼 말이다.


김유라(인사미술공간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작업리뷰

관객들이 만나게 되는 우한나의 오브제들은 마치 서사적 에필로그처럼 느껴진다. 직감이 작가에게 처음 감지된 이후 그것을 표현하는 퍼포먼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오브제들을 보는 것은 불꽃이 화려하게 터지고 난 뒤 공기 중에 베여있는 화약 냄새를 맡는 것, 혹은 생소한 시대에서 태어나 숨이 남아 있거나 있지않은 낯선 유물을 퇴적층으로부터 처음 조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특별한 인상들은 작가가 작업을 가시화하는 퍼포먼스적 과정에서 취사선택, 조합하는 재료 혹은 사물들이 완전히 분해되지 않은 채 여기저기에서 예전의 구상적인 외모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리고 곧 작업물들은 완벽하게 작가만을 위한 제3의(제 3세계의) 오브제가 된다. 야산에 전시되었던 수많은 외계적 오브제들-익숙한 기성품의 파편들이 돌연변이화 된-과 무의식의 상태로 추락하는 메리 포핀스, 시간이 가는 대로 엉클어지는 'Let it be'의 선율, 파괴당하는 장난감 등등.

이 오브제들은 비록 작가가 쫓아내버리고 싶은 각각의 내면들이 살아있던 시점, 그가 그것을 표현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지나 현재에 놓여있을지라도 '나는 과거로부터 왔기에 본질적으로 과거를 가리킬 수 밖에 없다'고 강하게 내색한다. 그렇기에 관객의 입장으로선 초대받지 않은 모임에 와 있는 듯한 서운함이 들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우의 현장으로부터 가져갈 수 있는 어떤 감상의 결말보다도 더욱 극적이고 치열했을 그 사물들의 절정기는 작가가 퍼포먼스를 끝내고 손을 털고 있을 때 이미 모두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강지원